시아버지의 농담, 시어머니의 감탄사
시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 1년에 한 달 이상. 프랑스인의 소통 능력과 욕구는 전 세계 통틀어 최고라지만, 시부모님의 화법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시댁에서의 아침은 보통 시아버지의 농담으로 시작된다.
어느 날 오전 9시, 물건을 팔기 위해 시아버지를 찾는 전화가 걸려온 적이 있다. 통화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안녕하세요? 00씨 댁 맞습니까? 00씨와 통화를 하고 싶은데요.”
“무슨 일 때문에 00씨를 찾으십니까?”
“저희 회사 상품을 소개해드리고 싶어서요. 저희 제품은..”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00씨는 죽었습니다. 오늘이 장례식 날이에요.”
“아, 이런. 정말 죄송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괜찮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판촉원에겐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시아버지가 한 번도 웃지 않고 진지하게 통화를 하는 바람에 우리는 뒤로 넘어갈 정도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물품 구입을 피하기 위해 본인 장례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흔치는 않으리라.
또 하루는 태국에서 먹었던 망고 스티키 라이스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 남편 말을 듣던 시아버지가 “나도 망고 좋아해.”라며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가 망고를 먹는 걸 본 적 없는 남편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맛도 좋고 향도 좋아. 근데 식감이 싫어서 먹진 않아”라며 나에게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리며 덧붙인다. “맙소사, 아버지. 그건 좋아한다고 할 수 없다고요” 라고 남편이 항의하자 그는 프랑스인 특유의 입으로 후, 바람 부는 시늉을 해 보이며 “먹지 않더라도 좋아할 수는 있는 거지”라고 대답한다. 아, 이 사람을 누가 이길 수 있을까. 사실 프랑스인치고 말이 없는 편인 시아버지는 입 밖으로 나오는 문장 70%가 농담 아닌 농담이다.
내 불어 실력이 시댁 고양이보다 못했을 때, 남편이 없을 때 본격 바디랭귀지 쇼가 될뻔했던 상황을 구제한 것은 바로 시어머니. 한국에서 남편과 연애한 지 8개월쯤 되던 시기, 프랑스인들은 이쯤 되면 가족에게 여자 친구를 소개한다며 남편은 나를 시골집으로 초대했다. 당시 언어 장벽 때문에 나와 일대일로 대화하긴 어려웠던 시부모님은 그 후로 1년 넘게(오직 나와 대화하기 위해) 매일 조금씩 영어공부를 하셨고, 특히 시어머니의 영어 실력은 그야말로 일취월장해 일상 생활회화는 꽤 유연하게 구사할 정도가 되었다.
시어머니는 왕성한 호기심과 상상력, 지치지 않는 수다 능력을 지닌 사람이며, 감탄사가 많은 어법을 구사하는 편이다. 가장 많이 쓰는 문장은 “괜찮아. 그럴 수 있지”와 “왜?”.
그녀의 귀여운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는 바로 이것.
집 근처 작은 숲으로 산책을 간 시부모님은 숲 한가운데 사과 열몇 개가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근방의 사냥꾼들이 사냥을 위해 흩뿌려 놓은 것임을 짐작한 시아버지는 갑작스레 장난기가 발동해 모르는 척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라고 물으셨다고 한다. 천진하고 귀여운 시어머니,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리더니 갑자기 하늘을 손가락질하며 “비행기가 떨어뜨린 거 아냐?”라고 대답하셨다고. 이 말 때문에 저녁 식사 내내 온 가족이 낄낄댔다.
어느 날 아침에는 “너와 함께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보내게 되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라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을 하시더니 갑자기 내게 사랑고백을 하신다. 부모님에게도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는 표현력 제로에 내향적인 며느리는 “저도요”라고 말하지 못하고 “감사해요. 다정하세요”라고 말하며 뒷걸음질 쳤지만.
해녀, 제주, 서울, 김밥, 세종대왕 같은 말을 한국어로 척척 하고 갈비찜이나 비빔밥 같은 요리를 해드리면 가까운 친척 모두에게 “갈비찜”과 “비빔밥”의 맛과 이름을 전파하는 시어머니. 선물해드린 오설록 차는 너무 예쁘고 향이 좋아서 일요일에만 마시고, 며느리와 셀카를 찍은 다음 날엔 인화해서 예쁜 액자에 넣어두시는 분.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리면 뭔가 말하고 싶지만 방해가 될까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거리는 시어머니가 보인다.
평생을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사셨고 이야기를 나눈 동양인은 그야말로 내가 처음. 이탈리아와 스위스 같은 인접 국가는 여행 삼아 가보셨지만 먼 아시아로의 여행은 생각도 못해보신 분들.
외람되지만, 결혼이란 걸 하기 전까지 나는 시댁은 아파트 옆 동의 어르신을 대하는 태도로 일관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 만나면 반갑지만 헤어질 때까지 적당한 거리와 예의를 지키는 관계 말이다. 그렇지만 이토록 귀엽고 웃긴 사람들과 어떻게 피상적인 대화만 나누며 지낼 수 있을까. 결혼 전의 결심은 어느새 눈 녹은 듯 사라지고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지지고 볶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