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말을 타고 플라밍고가 가득한 강을 건너는 순간
언덕 하나 보이지 않는 끝없는 평야, 눈부신 소금산에 핑크빛 염전, 흰 갈기를 흩날리는 말을 타고 플라밍고가 가득한 강을 건너는 것.
남프랑스에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곳이 있다.
“여행객들은 하지 않을 경험을 해보고 싶어”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내 말을 며칠이고 곱씹은 게 분명한 남편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하얀 말 한 마리가 마른 평야에 서 있는 풍경을 찍은 것이었다. 조용하고 천진한 풍경이었다. 프랑스인에게조차 익숙하지 않은 곳. 그 사진 한 장 때문에 이름만 말하면 모두가 알 법한 니스와 칸을 제쳐두고, 한국에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꺄마흐그에 가기로 한다.
파리에서 남쪽으로 750km.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흙이 쌓여 생성된 이곳은 930㎢에 달하는 서유럽 최대의 삼각주이다. 곳곳에 얕은 물가가 많아 꺄마흐그에만 400종이 넘는 새가 살고 있다. 특히 론강을 따라 D36 도로를 달리면 양쪽으로 얕은 물이 찰랑거리는 갯벌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수많은 플라밍고와 백조를 볼 수 있다.
길가에 차를 잠시 세워두고 갯벌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끝없는 수평선, 분홍색 부리를 물에 담근 채 먹이를 찾는 플라밍고,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까지. 모든 것이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아름답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이 풍경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여행이다.
또 다른 이색적인 풍경은 분홍색 염전이다. 꺄마흐그는 적은 강수량과 강한 햇살 덕분에 소금 생산량이 많다. 특정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희귀한 바다 소금인 꽃소금(Fleur De Sel)도 찾을 수 있다. 일반 소금보다 입자가 굵지만 잘 녹고 맛이 좋다. 소량 생산되기 때문에 비교적 고가이며, 영양 면에서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전의 바닷물은 특유의 박테리아 때문에 분홍색으로 보이는데, 태어날 때 회색이었던 플라밍고가 점점 분홍색으로 바뀌는 것도 이 박테리아 때문이라고 한다.
꺄마흐그에서 사람보다 자주 마주치는 건 흰색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 중 하나로 야생의 환경에서 자생하던 것을 길들여 키우기 시작했다. 체구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하지만, 힘이 세고 관절이 튼튼한 데다 영리해 승마용 말로 적합하다고 한다. 야생의 꺄마흐그 말은 15세기 무렵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프랑스인 대부분이 승마를 위해 이곳을 찾는다. 승마 경험이 없는 아이나 어른도 충분히 체험이 가능하다. 보통 오전과 오후로 나뉘는데 3시간 70유로 코스를 많이 선택한다. 우리를 담당했던 안젤린은 말 농장을 하는 아버지를 도와 5년째 승마 교육을 해오고 있다 했다. 언제부터 말을 타기 시작했는지 묻자, 뛰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장난스레 대답하며 씩 웃는다.
내가 탈 말은 10살로 이름은 자크. 다소 고집쟁이라 걷기 싫을 때는 딴짓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남편의 말은 샤샤, 13살로 먹보지만 영리한 녀석이라 했다. 10분 정도 기본적인 교육 후 승마를 시작하는데, 단순히 평지에서 몇 바퀴 돌 것이라 생각했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나와 같은 초보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승마체험은 꽤 본격적이었다.
우리는 숲과 평야, 도로를 가로질러 갯벌로 향했다. 풀숲에서 풀을 뜯느라 정신없는 말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던 나는 평야에 이르러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경쾌하다.
이윽고 다다른 갯벌에선 셀 수 없이 많은 플라밍고가 지척에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마침 기다란 철새 떼가 우리 머리를 지나 멀리 날아간다. 세상의 생명이 소리 없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고작 세시간의 체험일 뿐인데 하루가 지난 느낌이다. 오랜 시간 힘을 준 허벅지는 뻐근하고 딱딱한 안장 때문에 고생한 엉덩이도 얼얼하다. 그래도 누군가 이번 휴가는 어땠냐고 물어보면 활짝 웃으며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꺄마흐그에서의 여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생동감 넘쳤는지 몇 번이고 설명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