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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브르사비 Aug 31. 2020

나만 알고 싶은 남프랑스 소도시

니옹, 세규헤 그리고 베송 라 호맨느

걷기만 하는 여행을 꿈꾼 적 있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조바심 없이 그저 주위를 둘러보고 그곳의 사람들을 살펴보는,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을 작은 마을을 골라 두 발이 닿는 곳까지만 보고 느끼는 여행 말이다.



그 무엇도 하지 않을 자유, 니옹(Nyons)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두 손을 모으게 되는 곳.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아비뇽 인근의 마을, 니옹(Nyons)이 그렇다.


1400년대에 완공됐다는 마을 중심의 돌다리에 서면 탁 트인 산과 강물이 보인다. 느릿느릿 걷더라도 마을을 둘러보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시간. 강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천진한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걷는다. 수영복도, 타올도 준비하지 못했건만 그저 아이처럼 마음이 들뜨고 만다.


암벽을 기어 올라 다이빙하는 아이들, 책을 읽다 낮잠을 자는 어른들. 삼삼오오 모여앉은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여름 햇살처럼 마음이 쨍해진다. 물가에 발을 담그고 앉아 눈을 감는다. 푸른 잎맥이 펄떡펄떡 숨을 쉬고 바람에 몸을 뒤집는 나뭇잎이 소란스러운, 때는 바야흐로 여름이었다.




돌담길, 석양, 계절꽃에서 느끼는 위안, 세규헤(Seguret)

세규헤(Seguret)는 산 중턱에 자리한 마을로 10세기경 생긴 곳이다. 안전을 의미하는 라틴어 ‘Securitas’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과 같이 본래 마을을 보호하는 장벽이 마을 앞에 있었다고 한다. 산 정상에는 중세풍 교회가 있었으나 지금은 소실되어 흔적만 남아있으며, 정서향인 이 마을에선 아름다운 석양을 손쉽게 볼 수 있다. 소규모 와이너리가 마을 인근에 많이 있는데, 중저가의 품질 좋은 와인을 맛볼 수 있다.

 


로마식 작은 분수대에서 잠시 목을 축인다.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는 돌담과 돌길이 친근하다. 햇살이 쨍하게 비추는 집마다 여름꽃이 한창이다. 벽을 타고 작은 덩쿨을 만든 보랏빛 클레마티스, 보송보송한 솜털 같은 시계꽃,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색의 제라늄까지. 프랑스의 작은 마을은 특별한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이토록 아름답다. 누가 보지 않더라도 정성스레 꽃을 가꾸는 마음을 상상해본다.



세규헤는 프랑스 정부가 매년 선정하는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Les beaux villages de France)’로 지정된 바 있다. 1982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아름다운 마을’은 인구 2천 명 이하의 작은 마을을 대상으로 예술, 과학, 역사, 경관 등의 기준을 바탕으로 선정한다고 한다. 이 마을의 곳곳은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해 온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하다.



2천 년의 역사를 지닌 예술가 마을, 베송 라 호맨느(Vaison La Romaine)

1세기부터 자리를 지켰다는 로마풍의 다리를 중심으로 이곳은 윗마을과 아랫마을,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이 작은 마을을 프랑스 전역에 알린 계기는 다름 아닌 홍수. 1992년 강의 하천이 범람하며 다리 근처에 있던 민가를 덮쳤던 사건은 지금도 프랑스인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베송 라 호맨느에는 중세부터 수많은 예술가가 살았다. 작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극장이 4개나 있다. 작은 아틀리에는 셀 수 없이 많다. 여름을 맞이한 극장에선 연극과 예술영화 등이 상영 중이었고, 각종 전시회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비뇽에 버금가는 예술가 마을이다. 오늘날에도 이 마을엔 여러 작가, 화가 그리고 배우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은 바로 ‘Vaison Danses’라 불리는 세계적 무용 축제이다. 매년 6~7월, 두 달에 걸쳐 이곳에서 현대무용 축제가 열린다. 아비뇽 페스티벌이 보통 7월에 개최되니 두 축제를 묶어서 경험해본다면 좋겠다. 매주 화요일에는 마을 중심가에 프로방스풍 재래시장이 선다. 인근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재래시장이라고 하니 꼭 방문해보자.  




마을의 길은 어느 방향으로 걷더라도 중심으로 이어졌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늦은 오후, 이곳에 도착한 나는 긴 여름 해가 저물어갈 때까지 목적 없이 걸었다.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작은 예술가 마을에 감탄하고 또 감탄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여행을 했지만 ‘목적없이 걷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두 눈이 향하는 곳, 두 발이 움직이는 방향에 의존한 채 그저 걷고 또 걸었다. 해가 뜨면 걷고 해가 지면 걷기를 멈췄다. 걷다보니 길이 있었고 그 길은 어디론가 계속 이어졌다.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은 세상의 고작 한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느 풍경은 아름다웠고, 어떤 사람은 슬퍼보였으며 과거의 어떤 날이 그리워지는 순간도 있었다. 잔뜩 젖은 머리카락의 물기가 햇볕에 마르듯, 남프랑스를 걷는 동안 내 마음도 자꾸만 바삭바삭,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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