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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야 Feb 02. 2023

INFP 초등교사 생존기 03

03 / 교사가 아니야, 하인이었어.

03/

교사로서 보낸 첫 6개월, 나는 교사가 아니었다. 하인이었다.




‘수동공격’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우리 모두 문명인이 된 게 꽤 오래전이지만, 우리 모두는 DNA속에 공격성을 갖고 있다. 불만이 있으면 표시를 하고, 나를 다치게 하면 불쾌함을 표현하고, 이도 저도 안되면 주먹도끼를 찾는, 그런 공격성 말이다. 그렇게 표현하는 공격은 능동공격이라 할 수 있겠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수동공격은 다르다. 불만이 있어도 표정의 변화가 없고, 나를 다치게 해도 아무 말 않는다. 대신 그 화를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다가, 상대방을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거나, 빈정대거나, 약속에 일부러 늦거나, 비협조적이게 구는 등의 방법으로 되갚는다. 나 이렇게 화가 났으니 네가 눈치껏 알아채라, 하는 마음에 가깝지 싶다.     


학생 B는 수동공격의 고수였다. 수동공격 마에스트로 그 자체였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모둠활동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나머지 친구들이 도와주고, 대신해 주다가, 못 참고 B에게 한마디 뭐라고 하면, 그때부터 수동공격의 향연이 펼쳐지는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엎드려 울고(놀랍게도 눈물은 한 방울도 내지 않았다. 기술적 울음에 능했다.), 교사인 내가 물어보아도 입을 꾹 닫고 아무 말 않다가, 집에 가면 문자 메시지로 상대 학생에게 온갖 원망과 폭언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완벽하게 짜인 프레임이었다. B는 언제나 스스로를 억울하고 불쌍히 여겼고, 어눌한 발음으로 자신의 속상한 감정만을 가족들에게 전하면 영문을 모르는 가족들은 B를 철저한 피해자로 여겼다. B는 그렇게 자신만의 온실에서 살아왔고, 가족들은 B의 수동공격에 압제되어 B의 마음을 거스르는 모든 것을 가해자로 보았다. 학교, 학생, 담임교사를 미워할 만반의 준비를 해둔 것이다.


그래서 나는 3월의 어느 날, B의 언니에게 영문 모를 협박 전화를 받았다. 


제가 경찰인데, 아는 경찰이 학교 담당 경찰관이다.
올해도 B한테 학교폭력이 생기면, 정말 가만 안 두겠다.


 

쩝. 5년 차가 된 지금이야 어유 그러세요, 하고 흘려듣겠지만, 그 시절의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이었다. 

정말 나 큰일 났다, 어떡하지, 하면서 연신 사과를 했었다. 

이때 내 나쁜 습관이 한층 더 악화되어,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사과하는 이 태도를 고치는데 몇 년이 걸렸다.

(다행히 좋은 선배님들을 만나, 그들이 알려주신 덕분에 고칠 수 있었다. 나중에 또 자세히 풀어보겠다.)      




그래서 나는 INFP로서 타고난 예민함, 공감하는 이 능력을 B에게 모두 쏟아부었다.

조금이라도 말수가 적어지면 물어봐주고, 표정이 안 좋으면 가서 달래주고, 수동공격을 시작하면 내가 얼마나 널 좋아하는지 아니, 거짓으로 보듬으며 폭탄이 터지지 않게 해냈다.


그래, 나는 정말 잘 읽어냈다. 감정 탐지기를 120% 가동하면서, B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온 노력을 다 해냈다. 나의 타고난 '감정 민감성'은 이때 최고조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나는 교사가 아니라, 하인이 되어있었다.

그러면서 나 자신, 그리고 나의 교실은 악화일로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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