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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야 Feb 02. 2023

INFP 초등교사 생존기 04

04/ 수학여행은 교사의 피눈물이 흘러야 비로소 시작된다

04/


2018년 7월, 나는 완전히 소모되어 있었다. 


신경 다발을 긁어내어 너덜너덜해진 기분이 매일 같이 이어졌다. B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누가 한 마디라도 거슬리게 하면 즉시 엄마에게 전화를 하였고, 그녀는 나에게 득달같이 연락을 하고, 나는 장문의 문자로 달래 드리고... 이게 무슨 교사인가. 주인님 말 한마디에 벌벌 떨며 충성하는 하인 그 자체였다.     


누가 내 척추를 뽑아서 연필깎이에 넣고 돌려 깎는 기분이었다. 땀구멍 사이사이로 신경다발이 삐져나오는 듯한, 극한의 노이로제 상태에 몰려있었다. 우리 반의 천진하고 귀여운 아이들이 없었다면 필시 미쳐버렸으리라. 고맙다 도현아, 민준아. 너희는 정말 귀요미였어. 깨물어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단다. 너희 머리를 쓰다듬을 땐 걱정이 하나도 안 떠오르더라.


내 노이로제의 하이라이트는 수학여행이었다. 그때 우리 학교는 특이하게 1학기에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6학년 담임을 한 번이라도 맡아봤다면 알 것이다. 수학여행의 꽃은 조 편성이요, 그 꽃은 교사의 피눈물을 먹고 자라며, 학생들의 원망으로 기어이 만개한다. 나는 민주적인 리더와 독재의 짐승 그 사이에서 학생들의 눈치를 봐가며 아슬아슬하게 조 편성과 버스 자리 지정을 마쳤다. 뛸 듯이 기뻐하는 학생은 없었지만, 원망을 뼈에 새기며 우는 학생도 없는 듯했다. 오호라,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편 아닌가, 하고 안심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도 B와 같은 조, 같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던 건, 어떤 학생도 B를 보며 비아냥대거나 놀리지 않았다. B에게 짝이 없다고 해서 아무도 소리 내어 웃지 않았다. 나는 그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여 으르렁거릴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착한 아이들이었다. 착한 아이들이어서 지쳤을 뿐이다. 고작 12살 난 어린이들이다. 어른도 상대하기 버거운 수동공격을 옆에서 매일 같이 당하다 보면, 당연히 거리를 두고 싶을 테다. 한 마디만 실수해도 토라져 울고, 그래도 잘 대해줘야지 하고 마음먹고 이야기하다가 조금만 거슬리면 밤에 문자폭탄을 받는다. 솔직히 어느 학생이 그걸 다 받아주랴, 받아주는 학생이 있으면 오히려 내가 말렸을 테다.     


그래서 수학여행은 어떤 학생들에겐 잔인하다. 수학여행은 사회성 검진과 같다. 가기 전에 나랑 같이 버스에 앉는 것을 기꺼워할 친구가 몇이나 있는지, 같은 숙소에 들어갈 그룹을 만들어 뒀는지, 놀이기구를 같이 탈 친구가 있는지, 길고 긴 버스 안에서 친구와 무슨 대화를 할지 등등, 끊임없이 학생의 사회성을 테스트한다. 몇몇 학생들은 전혀 어려울 것 없이, 오히려 즐기면서 이 테스트를 의식도 하지 않고 끝내고, 보통의 학생들은 조금 고생하지만, 충분히 통과해 낸다. 소수의 학생들은 문턱부터 넘기 힘들어한다. B가 그랬듯이, 나도 어릴 적 그랬었다. 그래서 잘 알고 있다

.     

다만 어릴 적 내가 B와 달랐던 점이 있다면, 나는 어려서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나의 이 예민하고 깊은 감정을 자주 표출하면 안 되겠구나. 

부정적인 감정은 더더욱, 숨겨야겠구나. 하는 것을 알아버렸다.      


특히 남자들 사이에서 예민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치명적으로 위험하다. 남학생끼리 주먹다짐을 하다가 눈을 맞고 입이 찢어지는 것은 아프고 위험할지언정 사회성에는 문제가 없다.(오히려 가끔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남학생이 다른 남학생한테 놀림을 몇 번 받았다고 그것을 선생님께 이르고 새된 소리로 울어버리면, 그것은 자신의 사회성에 디폴트 선언을 하는 것과 같다. 나는 싸움을 잘하지도, 대범하지도 않았지만,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어슴프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결을 지닌 친구들이 섬세한 감정을 실수로 표출해 버리고, 그 결과 사회성의 부도를 겪는 모습을 옆에서 보며 확신을 가졌다. 아, 숨겨야겠구나.


그래서 나는 B를 보며 좀 아팠다. 어릴 적 내 모습을 거울로 비춰보는 듯해서 아팠고, 사실은 나도 해결해내지 못하고 근근이 숨겨오며 버텼는데, ‘너도 숨기고 버티렴’ 하고 조언해 줄 수 없는 나의 직업이 꽤 큰 무력감을 줬다. 

(아, 물론 숨기고 버티는 건 건강한 해결책이 아니다. 나에 한정하여 이 방식이 조금 효과가 있었을 뿐이다.)     


그래도, 내가 무력하든 아니든, B와 같이 앉을 친구가 있든 없든, 수학여행은 가야 했고, 날은 다가왔다. 안타깝게도 몇몇 아이들이, 그나마 남아있는 인류애와 선한 마음을 긁어모아 B를 같은 조에 넣어주고, 그중 한 명이 같이 앉아가 주었다.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조를 편성해 주었다. 결과는 어땠냐면, 선한 이들은 반드시 한 번은 배신당한다는 말로 대답하겠다.     

이렇게 끝이 났다. 몇몇 아이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며, 수학여행은 끝이 났다. 나는 고갈되어 바짝 마른나무줄기처럼 학교를 다니다가, 여름방학을 맞았다.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습하고 쨍한 여름날, 허겁지겁 에너지를 채우며 반쯤 살아났을 때, 전화를 하나 받았다. 교육청이었다. 

‘선생님, 발령을 축하드립니다. 9월에 마산에서 근무하시겠습니다. 며칠 뒤에 학교가 정해질 테니 교육청 홈페이지를 확인해 주세요.’

그렇게 나는 마산에 오게 되었다.

마산에서의 첫 출근 직전까지, 나의 머릿속엔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이번엔 기필코, 하인이 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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