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araz, Peru
고산병으로 하루를 통째로 앓으며 침대에 널부러져 있던 남미의 셋째날 아침. 이런 내가 걱정 되었는지 그새 친해진 호스텔 직원이 슬며시 방으로 들어와 뻗어있는 내 손에 고산병 약을 쥐여 주었다.
뜬금없는 긴급 처방에 물도 없이 꿀꺽 삼킨 후 한숨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더니 웬걸. 정신이 말짱해진다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원상 복귀!
땀으로 흠뻑 젖은 등짝에서 금방이라도 꼬릿꼬릿한 냄새가 올라올 것만 같아 우선 한바탕 뜨신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제야 꼬르륵. 주인. 제발 뭘 좀 먹어. 하며 뱃속이 울어댄다. 컨디션이 회복되자마자 몰려오는게 공복감이라니….
음. 남미에선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나려나. 감이 전혀 오질않지만 일단은 주린 배를 부여잡고 거리로 나서기로 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가리는 음식은 많지만 못 먹는 음식은 없었다. 알레르기가 있다거나 비위가 약한 편도 아니고. 한마디로 선택적 편식쟁이라는 뜻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은 호기심이 많고 도전정신이 자주 발동된다는 것 정도.
자주 가던 카페에서 신메뉴가 출시되었다는 화려한 전단지를 보면 "오늘도 같은 거 드시죠?"라고 묻는 사장님의 질문에 "어… 아뇨! 저 오늘은 신메뉴 먹어볼래요!"라며 요상한 도전정신을 불태우곤 하는 것이다. 도전의 결과는 대체로 썩 나쁘지 않았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남미에서 마주할 그 어떤 신비로운 음식들도 거뜬히 도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현지에선 현지식을 먹어줘야지! 하며 호기롭게 입장한 식당은 딱히 메뉴판이랄 것도 없는 작디작은 곳.
그나마 벽에 걸려있는 팻말의 글자를 하나하나 천천히 읽어보았다. 어쩌구뽀요저쩌구. 어? 뽀요?
어제 호스텔에서 스친 한국인 여행자의 꿀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음식점에 가서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면 무조건 뽀요(Pollo)를 시키세요. 뽀요는 치킨이거든요!'
그래. 그 어느 나라에서든 치킨은 배신하지 않겠지!하는 맹신(혹은 바램)으로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원 뽀요 플리즈!"
정확히 무슨 음식인지는 모르겠으나 가격도 무척이나 착했다. 5솔? 한국 돈으로 약 1,500원밖에 안 한다구?
싼값도 싼값인데, 나름의 애피타이저로 정체 모를 뼈가 둥둥 떠있는 초록색 수프가 내 앞에 놓여졌다.
오… 색이… 꽤나… 다채로운데? 조금 겁이 났지만 뭐 어떤가. 이 또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인 것을.
그렇게 한 스푼 가득 떠먹은 수프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온도와 낯익은 향신료 냄새는 바로 고수…! 고수가 가득 들은 고수 수프였다.
뒤이어 나온 메인 디시.
양념 범벅 뽀요+찐 감자 한 덩이+렌틸콩이 한가득 담긴 접시를 주더이다.
오우……! 점점 내 생각과는 다른 음식들이 테이블을 채우고 있었다. 이대로 무너질 도전정신이 아니지.
두 눈 질끈 감고 입으로 밀어 넣은 음식의 맛은…! 소금 한주먹 넣은 것 마냥 짜고 시고 맵고 달고…. 혓바닥이 느낄 수 있는 모든 맛의 영역을 넘나들고 있었다.
영 못 먹을 맛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먹을 수 있는 맛도 아니었다. 참고 먹다간 고산병이 아니라 고혈압이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 음식 남기면 벌받는다고 그랬는데…. 이렇게 나의 첫 뽀요 도전기는 짜디짠 실패로 막을 내렸다.
후식(이라고 하고 입가심이라 읽는다.)으로 아이스크림! 마찬가지로 무슨 맛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가 시릴 정도로 무척 시원했고 달콤했던 기억이.
이후 여행 사진을 뒤적여보면 식후 아이스크림을 참 많이도 먹었더라.
밤 산책 겸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엔 항상 한 봉다리 가득 과일을 사곤 했다.
그나마 입에 맞고 물리지 않는 것이 과일뿐이라….
게다가 저 옹골찬 애플망고가 2-3천 원밖에 안 하는 기적의 물가.
아마 내 인생에서 과일을 제일 많이, 자주 사 먹었을 시기가 아니었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