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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Mar 16. 2023

빙하 찾아 삼만리! 파스토루리 빙하

Nevado Pastoruri, Huaraz

귀에 꽂히는 알람 소리에 비척대며 눈을 떠보니, 그새 익숙해진 보라색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 이틀이면 떠나겠지.' 했던 이곳. 와라즈에서 며칠씩이나 같은 침대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역시 여행은 계획대로 안 굴러가야 제맛이지.

지옥훈련 같던 파룬호수를 다녀온 후, 자다가 뒤척이며 몸을 돌릴 때에도 '윽!' 앓는 소리를 내며 깰 정도로 온몸이 쑤셨다. 이 정도 근육통이면 꽤 오래 앓겠는데…? 아, 찜질방에서 뜨겁게 몸이나 지지고 싶다.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무렵, 매일을 도장 깨기 하듯 부지런히 트래킹을 다니던 옆 침대의 M언니가 내게 물었다. "우리 빙하 보러 갈래?"


"어유, 언니. 저 지금 침대에서 발 내딛기도 힘들어요." 조금 엄살을 피우며 대답하니 원래 그런 근육통은 운동으로 풀어줘야 하는 거라며, 어디선가 들었던 민간요법으로 나를 꼬시기 시작했다. 앞서 파스토루리 빙하를 다녀왔다던 P언니도 옆에서 거들기 시작했다. 딱히 춥지도 덥지도 않은 평온한 기후의 와라즈에서 빙하를 볼 수 있는 기회라고. 길도 평탄해 그리 어렵지 않은 코스라고 했다. 분명 나 스스로 저질 체력임을 확인했음에도 이미 종잇장처럼 얇아진 귀는 또 한 번 팔랑이고 말았다. 어휴.

파스토루리 빙하를 보기 위해 걸어가야 하는 길은 분명 평탄하지만, 해발이 5,250m나 된다는 것.

그래도 뜨악스러웠던 파론호수의 돌무덤에 비해 잘 만들어진 돌길을 보니 '이 정도는 둘레길이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선발대로 척척 앞서감에 뿌듯함을 느낄 때 즈음, 어라? 갑자기 숨이 턱 하고 막혀 오기 시작했다.


같이 빙하를 향해 걷던 M언니는 내가 숨을 고를 때까지 옆에 있어 주었다가, 점점 숨이 차는 빈도가 잦아져 급기야 숨을 한참 고르고서도 열 발자국 떼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지긋지긋한 고산병이 도지고 만 것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언니에게 먼저 가시라 했더니, 언니는 잠시 생각에 잠기고선 말없이 내 가방을 가져가 자기 어깨에 들쳐메고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혼자 보는 풍경보다 둘이 보는 풍경이 더 낫지 않겠느냐며.


너무너무 미안한 마음이 드는 한편, 우리가 빙하를 보기 위해서 내가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언니가 남자였으면 전 지금 바로 사랑에 빠졌을 거예요.'하며 넉살 부리는 것과 다시 페이스를 찾고 열심히 걷는 일뿐이었다.

선발대였던 우리를 앞서가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땀을 삐질 흘리며 헉헉대는 나를 보며 어느 나라 어느 언어인지는 모르겠으나 어깨를 툭툭 치고 으쌰! 하는 제스처를 보니, 그래. '힘내!'라는 응원의 메시지인 것은 단박에 눈치챌 수 있었다.


걷다 쉬다 걷다 쉬다를 여덟 번쯤 반복했을까. 도저히 보일 것 같지 않던 빙하가 저 멀리서 새하얗게 빛나고 있음에도 차마 기운찬 목소리는 나오지 않아서, 겨우 쥐어짜낸 목소리로 "언니, 저기, 빙하…."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우리가 도착해냈음을 알렸다.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줄 알았던 웅장한 빙하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빙하의 냉기 탓인지 이마 한가득 뻘뻘 흘렸던 땀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게 식어 사라졌다. 금세 체온이 내려가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졌지만 기분은 한껏 상쾌해졌다. 숨통이 트인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아. 진짜 힘들다. 그래도 어떻게 오긴 왔네. 와. 내 생애 처음 보는 빙하다.' 하며 또 한참을 빙하 곁에 머물렀다. 여짓 이곳을 향해 걸어오며 숨을 고르던 시간들보다도 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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