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sco, Peru
15일. 지구 반대편 남미에서 여행자로 살아간 지 2주하고도 조금 넘는 시간.
오늘은 페루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시간이 빠르다 빠르다 하더니 이렇게 쏜살같을 줄이야.
아쉬운 마음이 가득하지만 다음 도시로 넘어가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짐도 다시 싸야 하고, 빠트린 것이 없는지 체크해야 하고, 이곳에 남는 이와 뿔뿔이 흩어져 떠날 이들과 안녕도 해야 하고.
우선은 여정의 절반 이상을 함께한 동료들과 기념비적인 마지막을 위해 멋진 저녁 식사를 하는 걸로.
우리는 호스텔 근처 레스토랑을 찾았다. 무엇을 파는 곳인고 하니 우리가 차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지나쳤던 음식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 하였다.
설렘 반 긴장 반. 과연 나의 비위는 어디까지 일 것인가 알아보는 좋은 경험이 될지도 모르지!
그래도 나름 쿠스코에서 유명한 곳이었던지라 우리 팀 말고도 다른 테이블의 여행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똑같은 음식을 경험하러 왔으리라.
마지막 만찬에는 좋은 음식과 좋은 술이 빠지면 섭하다. 페루의 전통 칵테일이라는 피스코 사워(Pisco Sour)를 이제서야 맛 보다니…!
사실 여행 내내 맛보고 싶었지만 다 같이 축배를 들 오늘을 위해 계속 미뤄두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잔에 거품 반 불투명한 칵테일 반이 담겨져 나왔다. 모두가 1인 1잔을 챙겼음을 확인한 뒤 그 누구도 타이밍 재는 일 없이 짠-!을 외치며 잔을 부딪혔다. 아, 술이 달다!
뒤이어 나온 음식의 정체는 알파카 스테이크. 어째 밥과 감자튀김에 비해 양이 훨씬 작아 보이지만? 맛있는 술로 목을 축이고선 기분 좋은 마음에 누구 한 명 불평불만 없이 관용을 베풀었다.
비주얼만 보자면 '이거 알파카 고기야.'하고 말하지만 않으면 이게 알파카인지, 돼지고기 조림인지 모를 것 같다. 식감엔 확실한 차이가 있었지만 맛은… 괜찮은데? 오히려 소스의 짠맛에 가려져 고기의 정체보단 물을 먼저 찾게 되는 맛이었다.
페루의 마지막 밤을 장식할 대망의 음식은 바로바로 꾸시꾸이(Kusikuy)! '행복한 기니피그'라는 이름을 가진 기니피그 구이 되시겠다…!
내가 생각한 꾸시꾸이의 비주얼에 비해 상당히 귀여운 모습이었다. 안그래도 처음 주문할 때 종업원이 무어라 질문을 했었다. 그나마 우리들 중 스페인어가 능숙한 언니가 천천히 대답을 하기에 어떤 말이 오갔느냐 물어보니, 머리를 먹을지 다리를 먹을지 고르라고 했댄다. 아이고.
언니 덕에 맛을 보기도 전 비위가 상하는 일 없이 사이좋게 다리 한 짝씩 뜯어 먹을 수 있었다.
(당장 아무 검색창에 '꾸시꾸이'를 토톡토톡 검색해 본다면 용맹한 부족장의 모습을 하고 통으로 구워진 기니피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역시 뭐든 굽거나 튀기면 맛있어지는 걸까…? 옛 햄스터 집사의 약간의 죄책감은 뒤로하고 싹싹 발라 먹고 왔다. 네 덕에 우리가 행복해지는구나, 행복한 기니피그야.
돌아가는 길에 만난 길거리 음식! 모두가 줄줄이 줄을 서서 먹는 곳이니 이곳은 맛집임에 틀림없다며 줄 이어가기에 동참했다.
여러 꼬치 음식 중 우리가 고른 것은 안티쿠초(Anticucho). 소의 염통. 즉, 소 심장 꼬치. 아직 음식과 술이 들어갈 배가 남아있음은 물론, 호스텔에 남아있는 맥주는 털어야 하지 않겠냐며 야무지게 포장을 했다. 오늘 아주 별의별 별미를 다 먹어본다.
호스텔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말없이 터벅터벅 걷고 있자니 '오늘은 조금 둘러둘러 가볼까?'하는 제안에 모두들 대답했다. 응! 하고.
낮에 길을 잃고 운 좋게 오른 전망대로 가는 언덕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오르막길이었다. 배가 든든해서 그런가. 힘을 들여 올라온 것 같지 않았는데 뒤를 돌아보니 이런 풍경이 있었네.
우리는 돌담에 걸터앉아 총총한 빛이 가득한 쿠스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행을 하며 이런 순간이 많았던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어느 한 지점에 멈춰 서서 원하는 만큼 눈에 담고, 셔터를 누르고, 이 감정을 잊지 않으려 펜을 들고. 당장 주어진 순간의 풍경을 오롯이 음미할 수 있다는 것. 여행을 사랑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
하늘에 떠있는 별 보다 도시가 띄워낸 별들이 무척 아름답다고 느낀 밤.
다가오는 이별의 시간이 아쉬운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마음에 왠지 모를 위로를 받던 밤.
꽤나 낭만 있는 쿠스코의 마지막 밤이다.
안녕, 페루! 고마웠어. 아름다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