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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Jun 30. 2023

특별한 건 하나 없지만

Salar de Uyuni, Bolivia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눈을 뜨면 아침 해가 저 높이 떠있었고, 온 세상을 주황빛으로 물들이던 석양이 저 너머로 소리 없이 사라지면 이윽고 까무룩한 밤이 되어 하루의 끝을 고한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잠시 스치는 생각은 그대로 스쳐가도록 내버려 둔다. 그저 흐르는 시간 속을 느긋이 유영하며 마음껏 도태되어도 좋은 나날의 연속이다.

하루하루 새로이 갱신되는 크고 작은 불편함들이 있었지만 그날의 기분을 좌지우지할 만큼의 일들은 아니었다. 문득 일상에서 누렸던 것들이 생각났을지언정 또 당장의 내가 필요한 것들도 아니었다.


전등조차 켜지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의 하룻밤은 어두컴컴한 화장실만이 쪼끔 무서웠고, 충전을 할 수 있는 콘센트도 없었으니 한참 전에 꺼져버린 핸드폰과 카메라는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둔 채 외면한지 오래다.


고립된 생활이라고 하기엔 할 수 있는 것도, 해야 할 것도 꽤 많다. 다만 시간에 쫓기지 않고 느긋할 뿐. 여행자로서의 삶이 길어지니 제법 요령이 붙었다. '오늘 하루 해야 할 일'목록이 금세 머릿속에 촤라락!하고 떠오른다.

제일 먼저 세탁소에 가기로 한다. 강제적 단벌 신사 신세지만 옷은 항상 깔끔하게 입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 나름의 철칙인지라 아주 세밀하고 섬세한 작업으로 옷가지를 긁어모아야 한다.


어느 계절인지 가늠할 수 없는 알록달록한 옷 뭉치를 내려다보니 상의는 대체로 반팔이 주를 이뤘지만 바지는 기모가 들어간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게다가 겉옷은 쿠스코의 어느 한 가게에서 샀던 뽀송한 알파카 니트뿐이다. 일교차가 큰 탓에 추운 것보단 더운 게 낫지 싶어 구매한 니트였는데 그새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제일 작은 양말부터 반팔 몇 개, 바지 몇 개를 꾹꾹 눌러 한 봉지 두둑이 모인 빨랫감을 보니 괜히 뿌듯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스스로에게 맛있는 한 끼와 커피 한 잔의 상을 하사하기로 마음먹으며 호스텔의 주인장이 친히 그려준 <세탁소 가는 법> 지도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문을 나섰다.

표시된 곳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기에 죽죽 그어진 몇 개의 선만으로도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내일 오전에 찾으러 오라는 세탁소 주인의 대답을 듣고선 홀가분해진 몸과 마음으로 우유니의 작은 도시를 거닐어본다.


관광객이 신기한지 눈을 마주치면 무뚝뚝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식당 주인이 있는 반면, 이리 와서 과일 좀 보고 가라는 듯 웃으며 손짓하는 인상 좋은 할머니에게 홀린 듯 다가갔다. 국적 불문 웃으며 호의를 보이는 사람에겐 한없이 물렁해지고 마는 것이다.


내 손에 큼지막한 자두 6-7알이 든 검은 봉다리가 들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물 흐르듯 넘어가는 분위기에 어느샌가 지갑까지 열게 만든 할머니의 화려한 수완에 속절없이 넘어가버린 것이다. 그래도 봉다리 너머 자두의 달달한 향이 폴폴 느껴지니 아주 잘 익은 자두일 것이 틀림없다…! 절반은 지도를 그려준 호스텔의 주인에게 나누어줘야지!

호스텔에 도착하니 어쩐지 기운이 쫙 빠지는 기분이다. 오늘을 되짚으며 침대 위로 엎어지니 가물가물 잠이 몰려오는듯하다. 특별한 건 없지만 특별한 하루가 이렇게 또 저물어 가고 있었다.


어느새 여행할 날보다 여행한 날이 절반을 따라잡았다. 내일이면 남미에 있을 시간보다 남미에 머문 시간이 앞질러 갈 것이다. 곧 페루와 볼리비아를 지나 제 3의 나라로의 국경을 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음 한켠에 불쑥 떠오르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애써 모른척하며 우선은 일단, 단잠에 빠져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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