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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Aug 11. 2023

발파라이소, 그 여행의 조각들

Valparaiso, Chile

푸르른 바다 위 출렁이는 부표를 요람 삼아 잠든 바다사자. 살까 말까 수백 번의 고민 끝에 결국 내려놓은 것을 오랫동안 후회하게 될 줄 몰랐던 도시의 초상화. 여기가 동화 속이라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줄 것만 같은 윤기 나는 깜장 털을 가진 고양이. 발파라이소를 떠올리면 마음 한켠에서 반짝이는 여행의 조각들이 있다.

산티아고에서 버스로 약 2시간 만에 도착한 발파라이소는 항구의 도시답게 바다 위로 둥둥 떠있는 배들이 꽤 많다. 그중 저 멀리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 한 척이 우렁찬 뱃고동을 울리며 무시무시한 검은 연기를 내뿜고선 속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잔잔했던 바다의 표면이 울렁이며 금세 파도가 일었다.


저 멀리 지평선을 보고 있자니 하늘이고 바다고 사방을 둘러싼 모든 것이 푸른빛이다. 드넓게 펼쳐진 하늘에는 옅은 구름이 가득했다. 그 덕에 마치 하얀 물감 한 방울을 떨어트린 한 폭의 수채화 같기도 하다. 내가 만약 화가였다면 흰 도화지에 이 순간을 그려내어 평생 기억할 수 있었을 텐데. 괜히 떠오르는 아쉬운 마음에 들고 있던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이곳의 푸른빛을 가득 담아낼 뿐이었다.

바다를 충분히 즐겼으니 도심으로 들어가 볼까. 영차 소리를 내며 일어나려던 찰나, 앉아있는 동안 몇 번이고 눈이 마주쳐 무지 귀여운 미소를 날리던 꼬마 아이가 내 어깨를 톡톡 치더니 어딘가를 가리키며 외쳤다. "오타리아!(Otaria!)" 응? 오타리아가 뭐지? 아이의 손끝을 따라가 보니 바다 위 둥둥 떠있는 부표 위로 꿈질거리는 거대한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진짜 뭐지?


번들번들한 게 꼭 거대한 해삼 같기도 하고…. 움직임이 거의 없던 오타리아라는 물체가 으어엉 소리를 내며 드러낸 정체는 바로…! 자연 그대로를 누비며 살고 있는 야생의 바다사자였다. 살면서 몇 번의 바다를 보았지만 이렇게 큰, 게다가 야생의 해삼…이 아니고 바다사자를 볼 수 있다니!


잔뜩 늘어져있는 바다사자를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저기요. 일광욕을 너무 제대로 즐기고 있는 거 아니신지. 세상만사 귀찮다는 듯 눈을 뜰 기색이 전혀 없는 그들을 보며 아이보다 더 아이같이 좋아하는 모습을 꼬마는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헤헤 웃는 얼굴로 시선을 마주치고선 조금 머쓱해졌지만 미처 놓칠 뻔한 바다사자를 선물해 준 그에게 엄지 척 따봉을 날리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Grasias!(고마워!)

기억을 되짚어 보건대 한 달하고도 조금 넘는 여행 기간 동안 기념품 샵을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일하게 구매했던 기념품이라곤 내 짐가방에 달랑달랑 달려있는 라마 열쇠고리 뿐이었다.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 계단에 앉아 있을 적, 한 소녀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어 형형색색의 라마가 주렁주렁 매달린 열쇠고리 뭉치를 내밀고선 하나만 사달라며 다가오는 바람에 지갑을 열고 만 것이다.


그 소녀는 아르마스에 숨은 고수 장사꾼이었을까. 절대 하나만 팔지 않고 세 개를 사면 싸게 주겠다며 그렁그렁 한 눈망울로 '얼른 세 개 사. 후회하지 않을 거야.'라고 호소하는 듯했다. 색을 고르는 선택권조차 내겐 없었는지 돈을 얹어 주자마자 제일 아래의 열쇠고리 세 개를 빼내어 건네더이다. 결국 이 열쇠고리는 지인들에게 뿌려져 오늘날까지 꽤나 귀여움을 받고 있으니 나에게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 소녀에게는 꿩 먹고 알 먹고 둥지까지 턴 셈이다. 아, 물론 둥지는 내 지갑을 뜻한다.


여튼, 정식적으로 기념품 샵을 들른 것은 발파라이소에서 처음이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이곳은 모든 가게가 합심하여 똑같은 물건을 가져다 파는듯한 기념품 샵과는 달리, 발파라이소를 피사체로 꽤나 고가이면서 퀄리티 있는 물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는 점이다.


아기자기한 작은 소품부터 손수 엮어 만든 가방까지 눈을 반짝이게 만드는 물건들 사이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아름답다'라는 말이 절로 어울리는 발파라이소의 초상화였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은 둘째 치고, 앞으로 남은 3주간의 여정 동안 이 그림을 무사히 한국까지 들고 갈 수 있을까? 흑흑.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사진으로나마 남긴 이 그림은 남미를 다녀온 지 시간이 꽤 흐른 지금에도 후회하고 있다. 또 흑흑.

결국 텅 빈손과 아쉬운 마음만 잔뜩 안고선 길을 나섰더랜다. 호스텔의 방향으로 걷고 있자니 골목마다 참 멋들어진 곳이다. 담벼락 빼곡히 그려진 화려한 벽화에 한눈을 팔며 걷다가 멈칫한 그곳에는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검은 고양이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잔뜩 찌푸린 표정에 잠시 흠칫. 얘. 나는 그저 지나가는 여행자1이란다. 나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근데 너 잠시 산책 나온 거니? 털에 윤기가 도는 걸 보니 주인에게 사랑을 많이 받는가 보구나. 거기가 너네 집이야? 더 다가갔다간 미움받을 것만 같으니 적당한 거리 유지를 한 채 열심히 말을 걸었다.

나는 지구 반대편 대한민국에서 왔는데 너 거기 알아? 아 근데 너 한국말 아니? 꼬레아. 꼬레아에서 왔어.


지나가는 누군가 내 모습을 본다면 웬 미친 사람이 고양이한테 말을 건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곳에서 나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나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하여도 알아들을 이도 없다.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만큼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양이가 썩 지루했는지 기지개를 쭈욱 켜는 모습에 한 번 더 흠칫. 와, 너 되게 유연하구나? 두 손만 자유로웠다면 박수까지 쳐 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곧장 인사할 틈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유히 떠나는 깜장 털의 고양이. 작은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멈춰 선 발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자, 또 다른 여행의 조각을 모으러 떠나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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