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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Apr 27. 2023

길 잃은 여행자와 음유시인

Cusco, Peru

나는 호스텔로 가는 길을 잃었고 우리는 만났다.

딱 적시적기의 타이밍에.

마추픽추를 다녀온 다음 날의 아침. 이틀째 이어진 강행군의 여파가 이제야 몰려오기 시작했다.

호스텔에서 마주친 여행자들의 투어 합류 제안이 있었지만 잘 다녀오라는 배웅만을 남겼다.

또 다른 풍경의 기회를 너무 쉽사리 놓았나 싶은 아쉬움은 뒤로하고, 오늘 하루쯤은 그래도 될 것 같아서.


저녁때면 항상 왁자지껄했던 호스텔의 넓은 홀은 고요함으로 가라 앉아있었고, 나는 찌뿌드드한 몸을 한 번 쭈욱 켜낸 후 2층 테라스로 발걸음을 옮겨 창 너머 바깥 세상을 구경했다.


온통 붉은색의 지붕으로 둘러싸인 곳. 나는 일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이곳에서 쿠스코를 한 번씩 훔쳐보곤 했다. 이제 페루를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컨디션이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었으니 가볍게 산책이나 할까? 금세 재충전 된 여행자의 마음으로 나갈 채비를 한다.

호스텔을 나설 때까지는 몰랐으나 아르마스 광장에 가까워지면서 여태 느낀 적 없던 활기찬 기운이 거리에 넘치고 있었다. 무슨 날이었는진 모르겠지만 어떤 축제로 인해 한껏 떠들썩한 광장의 모습은 초면이었다.


목적지를 따로 정해두고 출발한 것이 아니었기에 발걸음이 닿는 대로 흘러가다 어느샌가 인파에 휩쓸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앞쪽의 길이 어디로 이어졌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이 광경이 신기했고 모두의 상기된 얼굴이 나 또한 들뜨게 했으므로.


그렇게 나는 길을 잃었다.

길을 잃은지도 모르는 길 잃은 사람의 발걸음은 세상에서 제일 당당하다. 한창 복작이는 광장을 가로질러 가기엔 무리가 있으니, 삥 둘러 돌아가 내가 아는 그 길이 나오리라 기대하며 도달한 골목은 생판 처음 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살면서 이때까지 스스로 길치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스마트폰 시대가 아닌 프린트된 종이 지도 한 장을 달랑 들고 다니던 아날로그 시대에도 잘만 쏘다녔던 사람인지라 한치의 의심 없이 생각했다.

'밤에만 지나쳤던 곳이라 낮이랑 풍경이 다르게 느껴지나 보다!' 하고….


조금씩 이상함을 감지한 건 칠렐레팔렐레 주변을 구경하며 걸어 다닌 지 좀 지나서였다.

어라, 오르막길이 이렇게 많았던가? 이런 가게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근데 맛있겠다. 웬 집에서 라마를 키우고 있지? 어…?

이제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지금 길을 잃었고, 내 손에는 지도가 없다는 걸. 물론 뻗어있는 길은 하나이니 다시 뒤돌아 걸어가면 되겠지만, 그 다음은? 급하게 켜본 구글 맵은 연결된 와이파이가 없으니 외로운 점 하나가 빈 화면에서 반짝반짝 빛날 뿐이었다.


다행히 아직 해는 지지 않았고, 주변에 길을 물을 사람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등줄기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경험을 했다. 며칠이나 머물렀던 도시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때였다. 등 뒤에서 'Help you?'라는 말이 들려온 것은. 아무래도 나의 표정이 꽤나 심각했던 모양이다. 지나가던 행인마저 나에게 도움을 주겠노라 먼저 다가와 주다니!


그러나 여기는 한국이 아닌 낯선 나라, 남미였다.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띤 나에게 그는 괜찮다며 ID 카드를 꺼내 보여주었다. 어째 길을 잃은 나보다 더 당황하며 나를 안심시키려는 모습에 신기하게도 이 상황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반대로 침착해진 나는 호스텔의 이름을 대고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짧은 영어로 설명했다. 나름 많은 여행자들이 오고 가는 곳이었던지라, 당연히 알겠지! 하며 기세등등 말한 내가 간과한 사실 하나. 그 호스텔은 한국 커뮤니티에서만 이름을 날린 곳인지라 현지인은 전혀 모를만했다는 거다.


둘다 난감한 표정으로 서있자니 영 뻘쭘한 이 상황을 피하고자 웃으며 땡큐~하며 뒤를 돌려는 찰나, 그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나에게 말했다. "mirador, find, hostel." 응? 뭐라구?


미라도르!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다 했더니 전망대를 말하는 거였다.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스페인어가 나오다니! 그 말인즉 전망대를 올라가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호스텔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인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으나 길을 잃은 채 이미 몇 번이고 올라온 오르막길 덕에 미라도르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고 했다.

잠깐이나마 느슨해졌던 경계심이 다시 튀어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만난지 몇분 채 되지 않은 낯선 이와의 동행은 좀…. 그는 대답을 재촉하는 일 없이 가만히 기다릴 뿐이었다.


짧은 시간 많은 생각이 스치는 가운데 갑자기 이 상황이 마냥 유쾌하게 느껴졌다. 가볍게 산책을 하러 나왔을 뿐인데 도시에서는 축제를 하고 있었고, 길을 잃었고, 나를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만났다. 이 모든 것들이 한 시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웃어넘길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솟았다. 혹시 모르지, 이 또한 인연일지도. 나를 쳐다보는 그에게 내가 아는 몇 안되는 스페인어로 대답했다. Vamos!(출발!)


실제로도 10분채 안되어 도착한 미라도르는 호스텔의 창문 너머 세상보다 훨씬 아기자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호스텔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아마도 그는 내게 멋진 풍경을 선물해 주고 싶어서 이곳으로 데려온 게 아니었을까?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쿠스코를 바라보며 이 또한 잊을 수 없는 풍경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여행 한 날보다 할 날이 더 많은 여행자와 입 찢어지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심심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던 그는 수많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실제로도 그의 가방에는 이름 모를 악기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우리는 서로 서투른 영어와 몸짓으로 대화를 했다. 말이 통했나? 싶으면 사실 서로 다른 이야기였고, 백 마디 말보다 갑자기 꺼내든 피리에 어쨌든 이 음유시인이 나에게 노래를 들려주겠노라 한다는 건 알아챘다.

갑작스러운 연주 소리에 지나가던 이들은 힐끔 쳐다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멈춰서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리곤 그들의 호응에 화답하듯 하듯 음유시인은 나를 보며 한마디를 날렸다. "Sing!"


그 말 한마디를 시작으로 우리는 길 한복판에서 함께 엉망진창으로 노래를 하며 그 노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떤 로맨스 영화에서나 나올 법 한 여자가 남자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그런 춤도 췄다.


이후 어떻게 호스텔에 돌아오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한바탕 웃으며 아르마스 광장으로 내려왔고, 앞으로 남은 나의 여정에 그는 엄지를 척하고 세워 굿 럭!하고 행운을 빌어주었으며, 한 번의 포옹을 끝으로 우리는 아쉬운 작별을 했다는 것만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길을 잃어서 다행이다. 그를 의심치 않고 함께 걷는 선택을 해서 다행이다. 어느 날 문득 그날의 쿠스코가, 그리고 그가 그리워질 때면 한곳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우리의 사진을 한번 꺼내보곤 한다. 아, 저 멀리 어디선가 그의 피리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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