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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Sep 08. 2023

바릴로체 산책일지

San Carlos de Bariloche, Argentina

여행길 위에서 날씨는 행운의 주사위 같은 것이다. 아무리 잘 굴려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비가 왕창 쏟아져 축축한 길을 걷게 되는 것이고, 대충 던졌는데 재수가 좋아 길 한가운데 가만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햇살을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저 맑고 쾌청한 하늘을 보라. 주사위 눈 6에 가까운, 여행자에게 더없는 행운의 날이다. 이런 날은 여지없이 배낭을 들쳐메고 나갈 채비를 한다. 준비의 시간이 길어져서는 안 된다. 주사위는 불어오는 바람 한 번에 떼굴떼굴 잘만 굴러가므로. 자, 신발 끈을 다시 한번 꽉 조여매자. 아마도 긴 산책이 될 것이다.

당당한 발걸음으로 문을 나섰으나 정작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없다. 딱히 손에 지도가 들려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발길이 이끄는 대로, 내 눈이 반짝이는 곳으로. 소풍 나온 네다섯 살 아이처럼 들뜬 마음을 한가득 안고 씩씩하게 걷는다. 멋대로 지어낸 콧노래도 흥얼거리면서. 그러다 보면 분명 나를 멈추게 할 풍경에 맞닿을 것이다. 이건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세 번의 국경을 넘고 적지 않은 도시에 발 도장을 찍으며 수많은 풍경을 마주했지만, 바릴로체를 채우고 있는 색채는 유독 특별하다. 파랗다. 아니, 투명하다. 깨끗하다. 맑다.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이유는 자그마한 휴지 조각 하나도 찾아볼 수 없어 기이할 정도로 청결한 곳이기 때문이리라.


어디든 눈을 돌려보면 항상 사람의 손이 닿고 있다는 듯 정돈된 길거리다. 애정 어린 손길로 도시를 돌보고 있는 누군가를 상상해 본다. 그 손길로 인해 누군가가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그 사랑은 또 다른 누군가의 발길이 닿게 만들 것이다. 무릇 사랑은 어디선가 발견되는 애정에서 비롯됨을 알기에, 이 도시는 사랑받아 마땅하다.

계속해서 불어오는 바람이 나의 등을 떠밀며 재촉하는 것인지, 저 멀리 빠르게 흘러가는 뭉게구름에 홀려 따라 걷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무슨 이유로든 이 호숫가로 오고자 했을 것이다. 발걸음이 닿고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이곳에 오게 된 건 분명 필연이라고.


드넓게 펼쳐진 호수를 초점 없이 바라보며 외딴섬이 된 기분을 느낀다. 조금 시린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울렁이는 물결 위로 부서지는 햇살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섬. 외딴섬을 다른 말로 고독도(孤獨島)라 하던가. 이곳을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이 오롯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자면 한 톨의 외로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사방에 깔린 자갈이 동글동글 귀엽기도 하다. 이내 내 마음의 모양도 모난 곳 하나 없이 둥그런 동그라미가 된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었나. '여행자에게 자주 그대 생각을 떠올리게 하고 싶거든 가장 흔한 것을 선물로 달라고 하면 된다. 그러면 그는 길을 걷다가도 가장 예쁜 돌을 찾게 될 것이고, 상처 없는 나뭇잎을 찾으며 그대를 생각할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부탁한 것은 아니었으나 손에 잡히는 돌들 사이에서 가장 반듯하고 매끈한 것 하나를 집어본다. 구태여 누군가를 떠올려야 한다면 나를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돌의 곡선을 따라 가만히 매만져본다. 따끈한 것이 바릴로체의 따스한 햇살이 서려있다. 그것을 한번 꽉 쥐어본 후 이내 돌 틈으로 다시 돌려보낸다. 내가 가져가고 싶은 것은 돌이 아닌 지금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금세 사라지는 환상 같은 것들이었으므로. 이를테면 잔잔하게 울렁이는 호수의 물결, 그 위로 눈이 시리도록 반짝이는 물비늘, 발끝에서 부서지는 너울의 파편, 서로 부딪히는 몽돌이 만들어낸 듣기 좋은 소리 같은 것들을 말이다.


길에서 마주친 이들의 얼굴에서도 반짝반짝 윤기가 흐른다. 푸른 하늘 사이 하얗게 빛나는 태양처럼 미소 띤 얼굴에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입꼬리가 올라간다. 서로의 시선 끝에 "안녕." 단 한마디 인사에도 상냥함이 묻어있다. 똑같이 답을 하던 나의 얼굴에도 햇살이 내려앉았을까? 그대에게 충분히 상냥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언젠가 당신이 내게 "바릴로체는 어떤 곳이었어?" 묻는다면, 조심스레 손을 마주 잡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그곳은 내 발길이 닿았던 도시 중 햇살이 가장 아름답게 부서지는 곳이었으며, 호숫가 위로 쏟아지던 빛의 울렁임은 이내 나의 마음마저 울렁이게 했다고. 가만히 거닐기만 해도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고. 그러니 당신의 나침반도 언젠가 그곳을 향했으면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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