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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Nov 19. 2023

김빵순

한 시절 불리우던 또 다른 내 이름

나는 빵을 아주 좋아한다. 중학교 1학년 생활 기록부에 담임선생님께서 "빵을 밥보다 좋아함."이라고 적어주실 정도였으니, 나의 빵 사랑은 남들에게 쉽게 들킬 만큼 컸으며, 꽤 어릴 적부터 이어져 온 것임이 확실했다.


그런 나를 너는 빵순이라고 불렀다. 빵을 좋아하는 것을 누구보다 가까워진 너에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느 날 '빵이 좋아? 내가 좋아?'하고 묻는 네가 귀여웠다. 그 모습을 더 보고 싶어서 생각하는 척 시간을 끄는 내게 너는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더 삐칠세라 '당연히 너지!'라고 말하면 '거짓말. 빵이 더 좋은 거지?'라며 믿지 않는 널 보며 나는 많이 웃었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우울함으로 땅을 파고 들어가려고 할 때면, 맛 좋은 빵을 한가득 안겨다 주며 ‘어때. 기분이 좀 나아졌어?’ 하며 내 기분이 금세 풀릴 거라는 착각을 하는 듯했다. 사실은 나를 위해 후다닥 빵을 사러 가는 너의 뒷모습이 사랑스러워 뭐든 상관없어지는 거였는데 말이다.


내 성을 따서 "김빵순."하고 단호히 부를 때는, 영 밥을 먹지 않고 빵만 먹어대는 나에게 주는 귀여운 경고 같은 것이었다. 송곳이라곤 전혀 드러나지 않는 위협에 나는 무서운 척하며 밥을 먹으면, 너는 그런 나를 예뻐했다. 밥보다 네가 주는 사랑의 포만감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배부르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잊지 못할 선명한 추억 하나가 있다. 딱히 우리의 기념일도, 특별한 날도 아니었던 평범한 어느 날. 등 뒤에서 꾸물꾸물 꺼내어 건넸던 박스 안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빵집의 케이크가 세 개나 들어있었다. 언제 이런 걸 사 왔냐며, 너에게 아이처럼 방방 뛰어가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거기 꽤 멀었을 텐데. 케이크보다도 내가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사 왔다던 너의 마음이, 사랑이 가슴 저미도록 와닿아서.


그러나 여느 연인들이 그러하듯, 우리에게도 끝은 찾아왔다. '나로 인해 네가 불행해지는 것 같아서'가 이별의 사유였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도, 원인도 말하지 않은 채 꼭꼭 숨기다가 네가 나에 대한 마음을 다 접었을 때 즈음에야 꺼낸 이야기였으니, 아닌 밤중에 뺨이라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런 게 어디 있느냐며 떼를 부리면서 너를 붙잡다가도, 사실은 내가 널 불행하게 만든 것 아닐까. 그 생각을 하니 손을 놓기란 쉬웠다.


그러고 보니 이별 통보를 받기 며칠 전, 어딘가 공허한 그 사람의 눈을 보며 '이 사람이 해맑게 웃던 모습을 본 게 언제였지?'라는 생각이 들었더란다. 그게 이별의 신호탄인 줄도 모르고. 바보 같은 나. 케이크를 사 들고 왔던 너처럼 널 웃게 해줄 작은 선물을 준비했던 바로 그날. 네가 헤어지자고 말했다. 준비한 선물은 건네지도 못했는데, 너는 그간 보여주지 않았던, 내가 사랑에 빠졌던 그 해맑은 미소를 보이며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그 모습에 나는 안도했던가. 네가 날 떠나야 그런 웃음을 짓는 거였구나, 하고. 그렇게 우리는 '연인'에서 '연인이었던' 사이가 되었다.


이 글은, 네가 그립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 떠나간 자리는 현실에 벅찬 내게 다른 일들로 채워지기 쉬웠고, 다만 사랑이 훑고 간 추억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나도 너에게 그런 사랑의 기억을, 하나쯤 남겨두었을까? 내가 그립지 않아도, 그때의 우리가 그리워질 만한 그런 추억. 네가 나에게 선물했던 달콤한 케이크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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