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
어느새 이태원 참사 1주기다. 1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변한 것은 없다. 진상은 전혀 규명되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참사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국가도 책임자들도 나몰라라다. 사법적으로도 이태원 참사를 "하나의 현상"이라 표현했던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보석으로 풀려났고, 헌법재판소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탄핵심판에서 전원 기각이란 결정을 선고했다. 나는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 이후 재난이 발생했을 때 구성원을 보호할 시스템을 보강했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사회적 환경은 주어진 고정물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토대 위에서 형성된 것인데도, 왜 질병의 원인을 항상 개인 차원의 고정된 요인으로만 가정하는지 질문한 것입니다. 유전적 요소인 가족력조차도 환경적 요인과 상호작용하면서 질병 발생에 영향을 주는데, 질병의 원인을 개인 차원에서만 고려할 때 우리가 놓치는 점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지요, 어떤 이가 박테리아에 노출되어 결핵에 걸리고, 또 다른 이가 흡연 때문에 폐암에 걸린다고 이야기하고 끝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 김승섭
앞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예전에 리뷰했던 책을 꺼내 들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한 사회역학자의 이야기다. 사회역학자란 직업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책에 따르면, 사회역학자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탐구해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 구성원들이 더 건강해질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질병의 사회적, 구조적 원인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지 못한 만큼 사회역학자란 직업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질병의 원인을 개인적인 영역에서 찾으려 한다. 이는 질병이 개인의 몸에 나타나는 만큼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 간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 개인을 설명할 때 소속된 사회를 떼어놓고 설명할 수는 없다. 개인의 질병도 마찬가지로 사회구조와 문화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폐암의 주원인이 흡연이지만 흡연의 가장 큰 원인은 각박한 삶이다. 사회역학자는 이런 복잡한 관계망을 해부하고 따라가 보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이태원 참사 이야기를 하다가 사회역학 이야기로 빠졌는가? 질병과 참사 모두 국가의 책임이라는 점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헌법에 나와있듯 국가는 공동체 내 구성원들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할 의무를 진다. 인간은 모두 늙고 병들고 죽는 존재이며, 언제나 재난 등의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 아래 살아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국가에게 의무를 지고 각종 권력을 부여하는 대신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사회계약을 맺는다.
문제는 평소에는 이런 국가의 계약과 책임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생명과 신체의 위협을 느끼는 주체는 소수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만약 보호받지 못하고 피해를 받는다 하더라도 조명받지 않는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재난이 닥쳤을 때가 되어서야 우리 국가가 계약과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참사에서 가시화되는 시스템과 매뉴얼의 문제가 사실은 우리 사회에 상존하던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를 그 사건 자체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책임자들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 제대로 된 지시를 하지 못했고 안전을 위해 준비된 제도와 매뉴얼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위험이 발생했을 때 사회적 안전망이 작동한다는 믿음이 깨진 것이다. 사고 당시에도, 사고 이후 수습 과정에서도 어느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모습은 구성원들에게 생존은 개인의 몫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결국 이렇게 모두가 자기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는다면 우리 사회는 구성원 모두가 취약한 상황에 처하지 않겠다 경쟁하는 정글이 되지 않을까? 우린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우리 사회는 구성원들의 건강을 어디까지 책임질 것인가?
“개인 처벌을 위한 사법적 관점이 다른 문제의식들을 압도했던 세월호 조사 사례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한다”며 참사를 낳은 ‘구조적 원인’ 규명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대사회의 재난은 몇몇 악당의 결정적 잘못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러 행위자의 결정적이지 않은 잘못과 실수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들을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 ‘구조’를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매리언 영은 정치의 문제를 (사회)정의의 문제와 일치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책임을 “구조적 부정의”와 연결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구조란 “과거의 한 행동과 과거에 내렸던 결정이 누적되어 물질세계에 흔적을 남긴” 것으로서 개인들의 행위를 제약하는 제도적·사회적인 규칙이다. 따라서 구조적 부정의란 개별 행위자의 잘못이 아닌 허용된 규칙‧규범의 범위 안에서 집합적인 행위자와 제도가 상호작용한 결과로 나타난다.
- '재난 참사에서 책임의 해체적 구성: 10‧29 이태원 참사를 중심으로', 조지훈
사회 구조적 원인을 논하기 위해서는 보다 내부로 파고들어야 한다. 매리언 영은 구조를 "과거의 한 행동과 과거에 내렸던 결정이 누적되어 물질세계에 흔적을 남긴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한 명의 책임자나 한 부처의 문제가 아님을 말한다. 이태원 참사의 경우에도 신고가 들어갔음에도 이태원에 왜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우선순위의 문제와 이러한 위험이 발생했을 때 실무진과 책임자 간 의사결정과 책임소재의 문제 그리고 우리 사회가 축제 등의 문화를 즐기는 이들을 인식하는 태도 등을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사법적인 문제, 사전대비 문제, 인력 배분 문제 등 다양한 문제로 확장할 수 있다.
문제는 과거의 잘못된 결정들이 계속 누적되었고 이에 대해 누구도 개선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범인을 찾으려는 태도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반성하려는 태도가 필요한 이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름 의미를 가진다. 이 책은 운이 좋아 생존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 무엇을 해야 할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생각하는 첫 단계는 인지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사회 곳곳에 아픈 사람들이 많음을 배웠다.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고통들을 겪고 있는 이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비장해졌다. 저자가 제시하는 숫자와 연구들이 마치 우리가 이제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마지노선처럼 느껴졌다. 이것을 안 이상 우리 사회가 이 이상으로 나빠지도록 방치해 둘 수는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을 읽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애쓰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나도 조금 더 힘을 보태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것이 연대의 힘이라 생각한다. 많은 힘을 보태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함께 하려 한다.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시작이다. 나도 같이 아픔의 길을 걸어보고자 한다.
우리 사회에서 아프다는 말을 하면 괜찮냐는 위로가 아닌 나도 아프다는 다그침이 돌아온다. 자신의 고통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 된다. 우리를 공동체로 묶던 신뢰와 공감은 흔들리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의 기본논리는 생존과 탈출에 가까워졌다. 결국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렀는가?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세월호 참사,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백혈병...다시 우린 이 질문에 가닿는다. 당신은 건강한가? 우리 사회는 건강한가?
건강이 공동체 모두의 이야기가 되기를 빌어본다.
'모든 이에게 건강을'
- 세계보건기구의 표어 -
아무리 우아한 이론을 가져와도 혐오는 혐오이고, 어떤 낙인을 갖다 붙여도 사랑은 사랑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혐오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저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분명 그럴 거라고 저는 믿어요.
혐오의 비가 쏟아지는데, 이 비를 멈추게 할 길이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 기득권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합니다. 제가 공부를 하면서 또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작게라도 배운 게 있다면,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피하지 않고 함께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 김승섭
“처벌보다 ‘구조적 원인’에 집중하자, 그게 세월호 실패의 교훈” - 경향신문 (khan.co.kr)
웹진 인-무브 - 재난 참사에서 책임의 해체적 구성: 10‧29 이태원 참사를 중심으로(1/2) (en-movement.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