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경계에 서 있다.
내가 사람 잘못 봤나? 보면 항문외과 환자랑 정신과 환자들의 공통점이 꼭 있어. 왜 병을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숨기고 피하려고만 해요? 병은 그냥 병일 뿐이잖아.
원래 아침이 오기 전에는 새벽이 제일 어두운 법이잖아요.
그렇지만 이건 분명해요.
처음부터 환자인 사람은 없고 마지막까지 환자인 사람도 없어요.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정신병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는 드라마다. 돌아보면 '하얀 거탑', '뉴하트' 그리고 '굿닥터'까지 여태껏 흥행한 의학드라마는 꽤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정신과를 전문으로 다루는 드라마는 드물었다. 필자는 이러한 이유가 편견과 낙인이 따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분과 자체에도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고 환자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그 예로 정신과는 덜 과학적이고 덜 전문적이라는 인식이나 정신질환이 그 환자 개인만의 문제라는 인식이 있다. 정신과는 병 외에도 이런 사회적 인식과도 싸워야 한다는 점이 더 힘들다. 이 드라마는 이러한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돌파하기로 했다는 점에서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사람은 변할 수 있는가?’ 우리가 삶의 많은 영역에서 맞닥뜨리는 질문 중 하나다. 특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은 이 질문을 보다 절박하게 던진다. 아마 스스로에게 이렇게 자문할 것이다. ‘과연 내가 나아질 수 있을까?’ 질병, 낙인 그리고 소외는 사람을 작아지게 하고 자기 자신조차 자신을 믿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나아질 수 없을까? 만약 나아질 수 없다면, 지금 우리가 하는 치료나 교육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진부하게 들릴 수 있지만 우리는 결국 전진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는 그 희망 하나로 오늘을 버티고 있으니 말이다. 이 드라마는 그 이야기 내내 그런 희망을 놓지 않는다.
위 논의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지금 시점, 내가 본 모습으로 그 사람을 규정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볼 수도 있다. 우리가 만나는 모습은 그의 삶의 궤적에서 극히 일부 모습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한 개인의 내면을 꿰뚫어 볼 수도 없다. 그의 따뜻한 모습이 속앓이를 하며 겨우내 꺼낸 모습일 수도 있고 까칠한 모습이 전쟁과 같은 삶을 살아내기 위한 치열한 투쟁일 수도 있다. 단편적인 모습으로 그 존재를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낙인과 혐오에 가장 쉽게 노출되는 이들은 약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는 정신과 환자들을 그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 한 명이 아니라 자신만의 우주를 갖고 있는 한 개인으로 그리려 노력한다. 그 개인 삶의 맥락과 역사들을 재건하려는 노력이 눈에 띄었다.
마지막 키워드를 말해보자면 ‘연대’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의료진과 환자라는 역할에 경계선이 없다. 환자를 보호하고 치료하던 이들이 마음의 병을 앓기도 하고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이 다른 사람의 질병을 고쳐주기도 한다. 그렇게 ‘나도 이 사람처럼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그 사람 편에 서도록 만든다. 실제 삶에서도 각자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들의 양상이 다 다르겠지만 결국 인간 존재의 본질적 어려움은 동일하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흔들리고 외로울 수밖에 없으면서도 하나의 인격으로서 존중받기를 바란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함께 싸우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 의미에서 경계선을 걷고 있다. 불안과 안정, 독립과 의존 그리고 현실과 이상까지. 그렇게 여러 방향 사이에서 방황하며 정신적인 어려움도 겪었다. 그러한 어려움들을 겪으며 배운 점은 지금은 괜찮지만 언제 또다시 균형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완치가 딱 되는 문제라기보다는 내 심리와 행동을 평생에 걸쳐 관리한다는 개념에 더 가깝다. 심리치료는 그것을 잘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의 행동, 자원, 반응, 기질 등을 알아채게 돕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나도 꾸준히 나를 사랑하고 들여다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