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중한 피아노에서 한 없이 가벼운 우쿨렐레로.
그림 아래로는 무수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언제나 고풍스러운 트윈룩을 고수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 같은 이모들.
햇빛을 가려버리는 육중한 피아노 사이에 이 영화의 주인공 폴은 서있다.
폴은 침묵의 대가이다.
얼굴에 표정을 띄우지도, 소리 내어 말하지도 않는다.
벽면 수행 30여 년. 피아노를 치거나 슈게트를 먹을 뿐이다.
피아노가 아닌 공장에서 나사를 조이는 일로 바뀌어도 다를 것이 없다는 듯, 설령 우주 한가운데 떨어트려 놓아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무표정.
폴의 영혼은 어느 서랍장 속에 부동산 계약서처럼, 고이 보관해 놓은 듯이 슬픈 듯 멍한 표정이다.
침묵은 과거의 가치를 고수하며 ‘귀족’ 적임을 추구하는 이모들의 슬하에서 무거움을 더하고 견고해졌다.
무거움 속에선 변화가 없다. 변화가 없으니 미래가 있을 리 없다. 미래가 없으니 의지를 가질 이유 또한 없다.
주인공 폴은 피아노와 이모들을 중심으로 ‘슈게트, 공원’ 두 단어만으로도 충분한 쳇바퀴의 삶을 살 수 있었다.
프루스트 부인은 이런 폴의 무거움에 파문을 만들었다.
어두운 현관을 지나 곰 같은 커다란 개를 뒤로하고 드러난 프루스트 부인의 비밀정원은 햇빛이 잘 드는 거실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딱딱한 바닥을 파고 포슬포슬한 흙을 채워 넣은 텃밭은 넘실대는 햇빛을 듬뿍 받은 초록이다.
서양의 마녀같이, 동양의 한의사같이 본인만의 레시피로 만든 허브티와 마들렌으로 일종의 불법 최면치료를 한다.
프루스트 부인의 툭툭 던지는 말들은 괴팍하기도 하지만 수다스럽고 따뜻하다.
햇빛을 막아내던 피아노 대신 햇빛 속에서 연주하는 우쿨렐레는 가볍다.
심지어 암과 죽음에 대면한 그녀의 태도는 겸허하지만 산뜻하리만큼 무겁지 않다.
새로운 여행을 준비 중이라는 그녀는 따뜻한 햇빛으로 내리쬐다 산들바람의 숨결과 함께 어느덧 다른 모습으로 또 다른 인생을 여행할 것만 같다.
아늑하고 무거운 폴의 일상은 마담 프루스트의 허브티와 마들렌으로 점점 흔들렸다.
모든 기억이 달콤하기만 할 수는 없지만 무의식에 잠긴 기억의 파편들을 흐트러트려 부유하는 행복과 그리움과 슬픔들의 감정들 사이를 여행했다.
그렇다 하여 비극적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모들이 폴에게 했듯이 꼭꼭 숨겨놓고 비밀에 부쳐놓으면 슬퍼할 수도 없겠지만 극복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오해, 부모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나서 부모를 죽음으로 내몬 그 피아노 건반 뚜껑에 손가락이 밟혀 피아노와 작별을 한다.
피아노 위에 꽃을 피우고 꽃에 물을 주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피아노는 물리적으로는 두 양친만 내리눌렀지만 오랜 세월 동안 폴을 자라지 못하게 짓누른 것 또한 사실이다.
피아노 위에 올라가 흐드러지게 핀 꽃에 물을 주는 폴은 그것의 무게감을 극복하고 돌이킬 수 없는 그 비극적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사실, 변한 것은 없다.
불쌍하게 보자면 역시 폴은 불우하기 짝이 없다.
두 살 때 눈앞에서 부모가 돌아가시고 피아노밖에 없던 인생에서 이제 피아노도 없어졌다.
하지만 폴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가벼워졌다. 변화로 인해 미래가 생겼다.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
사랑 한 스푼, 꿀 한 스푼
햇빛 한 줄기가 그의 무지개가 되고
모래 한 줌이 그의 성이자
그림을 그릴 크레용이 되겠죠.
필요한 건 그뿐이에요
”
과거 어머니가 폴에게 말한 것처럼 필요한 건 이뿐이다.
무거움은 필요 없었다. 그냥 폴의 의지대로 자기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
영화 내내 가장 좋았던 대사가 있다.
이것으로 끝맺음을 해볼까 한다.
“천국은 바로 여깄는데 당신들이 망쳐요.
화장실 문에도 쓰여있죠,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당신들은 지구보다 변소에 더 신경 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