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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몽 Sep 29. 2016

유체이탈

글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평범하고 수줍은  여자애였다. 말랐었고 안경까지 써서 외모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사춘기 때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만화책과 무협소설에 빠졌고 나름 시라는 것을 끄적였다.


나의 초년은 종교적이기도 했다. 뭐랄까 주변 환경이 종교 종합선물세트였다고나 할까.

강원도 도계읍 동네에서 나는 매일 아침 성당과 교회와 절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크리스마스의 캐롤송과 성탄절

석가모니 탄신일 날 연등축제 ᆢ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동네에 울려퍼지는 불경소리.

하물며 집에서 가까운 이웃집 두 군데는 무당집이  있었다.

나는 집 도로 맞은 편에 살았던 무당집 딸 순복이와는 어릴 때 동네 친구여서 굿판이 벌어질 때나 아닐 때나 놀러가 곤 했다. 순복이네 집 대문옆에는 언제나  빨간 천조각이  왕대무 깃대에서  펄럭였다.

아버지는 종교적으로 불교파였지만 절에 가는 모습은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늘 불경이나 회심가를 측음기로 틀어 가족들의  아침 잠을 방해하곤 하였다.

재미있는 건 아버지는 나도 없는 카톨릭 세례명이 있다는 것이다. 아기 때 받았는데   

  당신 의사가 아니였음을 거듭 강조하셨던 기억이 난다.

세례명이 토마 였던가?


 엄마는 완전 보살파는 아니였고 초파일에만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등을 달곤  했다. 하지만 누구의 이름을 특별하게 잘되게 해줄 때는 등을 두개정도 절에 달았다. 아버지거나 오빠일 가능성이 높다.

어렸을 때 남동생을 위해 엄마는 굿을 한 적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잔병이 많아 단명을 피하기 위해 살을 풀어주는 굿을 했다고 들었다. 하얀 머리 띠를 두르고 눈을 부라리며 집 구석구석을 대나무 깃대로 쑤시던 덕남네 무당 아줌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사람 모양으로 오린 종이 인형이 쌀을 담은 밥그릇 수마다 꽂혀 있고  문종이를 여러겹으로 오렸다가 펼친 채가 주렁주렁 매달려 흔들거렸다.


나는 방학 때면 탄광읍에서 농사 짓는 시골인 할머니 집에 놀러가곤 했다. 나의 고모는 일곱 분이다. 초등학교4학년  겨울 크리스마스 카드를  일곱 고모에게 보내려고 고심했다가 뭘 몰랐던 내가 머리 쓴다고 한 것이 두 개의 봉투에 나눠서 카드를 보냈다. 이후 고모들은  우표값을 지불하고 나의 카드를 받아봐야만 했었다.

일곱 명의 고모 중 나보다 두 살 많던 막내 고모와는 친 자매 처럼 지냈다.

고모들은 독실한 카톨릭파였다.

그 덕에 나는 성당 미사에 가끔씩 참여했고 찬송가나 성경책에서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의 그림엽서를 많이 보았다.

나는 막내 고모를 앙가고모라고 불렀다.

왜 그렇게 부르게 됐는지 모르겠다. 다들 앙가라 불러서 나도 그렇게 불렀다.

고모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렀지만  일곱 명의 고모를 기억하기 위해 멋대로 지어서 부른 별칭이 애칭이 되어버렸다.

나의 아버지는 도합 일곱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계옥.미아리,계희,계월,계나리.계선,앙가ᆢ첫째 고모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환갑을 넘기고 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고모들과의 인연도 끊겼다.

 

나는 친구의 이끌림에 교회를 다녔다.

고등학교 때 나와 아버지는 종교전쟁을 치뤘다.그 당시 나는 교회파였고 조용히 불교파와 무당파를 적대시했다.

가족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큰 공로파는 유교였을지도 모른다. 종교를 넘어 기본에 충실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우리집 가훈은 가화만사성이었다.

가화만사성에 위배되면 아무리 어떤 종교 사상이라도 불온한것으로 간주되었다.

위아래를 구분 못하고 상하좌우를 돌아볼 줄 모르는 독행파는 가족들에게 인정 받지 못했다.

나는 기독교에 심취해 믿음으로 아버지와 엄마 동생들을 전도하기 위해 금식기도며 부흥회를 쫓아다녔다.


아버지는 어느날 내가 아끼는 성경책을 마당에서 화형식을 감행했다. 사납게 찢겨진 성경책 두 쪼각을 거머쥔 아버지는 소리쳤다.


ㅡ이깟게 뭔데 허구헌날 마귀 타령이야

나는 그 당시 유일신의 계명을 철저하게 신봉했으므로

아버지의 불교 테이프를 경멸했다.

조상제사도 마귀섬김이라고 도외시했다.

 나는 척박한 탄광읍에서 책 보는 것으로 나의 문화욕구를 달랬다. 그것이 없었다면 나는 삐딱한 광신도가 되었을 것이다.


내 의식에서는 그나마 기준선이 있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약자를 괴롭히거나 생명을 해하고 상대를 아프게 하고 괴롭히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나의 타고 난 심성탓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조율하고 엄마와 조율하고ᆢ내가 모르는 세계와 싸우지 않고 조율하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래서였을까ᆢ나는 모순에 봉착하며 그 모순을 이해하고 넘어설 부딪침 없는 사통팔통하는 도를 구했다.

아무리 좋은 명약이라도 서로 극을 한다면  그것은 생명을 죽음으로 밀어넣는 독극물일 뿐이다.

나는 서로 극하지 않는 도를 구했다.  18살의 나는 아버지와 다툼하고 밤새 지붕 위에 올라가 눈물을 흘렸다.

ㅡ저는 하느님도 믿고 부처님도 믿고 알라도 믿고 공자님과  예수님의 말씀도 모두 좋기에 모두 버릴  수 없나이다.

설사 이 세상에 모든 진리가 사라진다해도

저는 선하게 살기를 갈구합니다.

모순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진리를 구합니다.

모두가 극하지 않고 잘 화평해 살기를 나는 구합니다.


나는 나의 진짜 마음을 하늘에 말했다.


그 이후로 나는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이 매이지 않았다.

진리는 나에게 현실이어야하고 실존이어야 했다.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게 하는 모든 것을 배움으로 삼고자했다.


내 안의 모순과 이 진리와  저 진리가 존재하는 이유와 상호작용을 알고 이해하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것은 나를 다양성으로 밀어넣었다.

하나를 바로 이해하려면 총체적인 바라봄이 절실해졌다.

문학, 음악, 역사,생물, 기타등등

진리는 총체적인 것이다.

미래는 더욱 총체적이고 융합하려한다.

미래는 플랫폼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과 저것이 소통할 수 있는 다양성의 시대ᆢ



오빠는 문학에 풍덩거렸고 결국 시인이 되었고 현재까지

 국어교사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오빠를 동경해서 오빠가 흘린 책들을 머리에 담기 바빴다.

이해도 못하는 글들을 교과서 뒤에 숨기며 수업을 배반했고  나를 용서한 건 국어점수였다.

내가 대학을 포기한 것은 좀 아쉬운 부분이지만 지금은 그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나의 물불 안가리고 미치는 성격에 대학 갔다면 데모대에 설치다 머리통이 깨졌거나 고문에 병신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나 저렇게나 대학은 제대로 못마쳤을 것 같다.

어쩌면 대학을 못가게 된 것으로 목숨을 부지해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조상의 손길이 어떤 작용을 했는지 그 심오한 디테일까지 파악하기는 아직 나의 도는 미치지 못했다.

다만 전후좌우를 살피고 최근 공부하는 명리학 덕분에 추론의 능력을 획득하는 중이다.

사주의 글자는 숫자이다. 그 숫자 암호를  사주팔자 글자로 다시 동양 날짜로 쓴 것뿐이다.

그런데 누가 믿겠는가 태어난 년과 달과 일과 시가

자신의 운명 코드일줄ᆢ

명리학은 그 코드를 스캔하는 것이다. 글자 한자에 담긴 정보를 스캔하는 것ᆢ값을 아는 것이다.

나는 초년에 화개라는 철학성과 종교성을 가졌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연계성을 가지고 보니 나는 종교로 흘러가는 기운을 느끼며 살았다.

지독하게 험한 자연재해의 꿈

홍역에 걸렸을 때 열에 들떠 엄마 주위를 돌면서 나를 쫒아오던 괴물을 본것.

가위 눌림

더구나 고2때는 교회가면 부흥회 때 귀신도 체험하고 새벽 기도에 미래의 환상까지 보았다.


나는 다양성과 새로움을 좋아했고 거기다 변혁도 꿈꾼다.

그런 성향이라 그런지 기독교 말고도 불교 명상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 나는 고3 졸업후 라스니쉬나 크리스티나무티나 단학에 빠져 집에서 수행하기 일쑤였다.

나름 기체험도 했고 나름 순수할 때라 그런지 접하고 집중하면 기나 꿈 영적 체험을 자주 하곤 했다.

결국 나는 부모와 일찍 작별을 고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1년의 시간을 삭발한 행자로 보내면서 나는 절에 있는 책들을 몰래 삼켰다.

주지 스님이 며칠 씩  출타를 하면 혼자 절에 있는 것이 무서워 밤새 낮밤을 가리지 않고 불교 서적을   읽었다.

내 마음속에는 하느님과 석가모니부처가 함께 살게 되었다.

이 세상은 많은 종교가 있지만 내게 종교의 인연은 그렇게 다가왔고 찾아나섰다.

절 밖에 세워진 미륵불이 무슨 불이냐고 알면서 주지스님에게 여쭈어 보았다.

대답은 시크했다.

ㅡ미래세계에 오시는 부처다

ㅡ그럼 그 미륵 부처는 언제 옵니까ᆢ

ㅡ미륵불은 우리나라에 왔다가셨다

나는 그 말이 충격적이었다.

머리 깎은지 1년이  될까한 행자에게 들려줄 말은 아닌듯 했다.

ㅡ스님께서는 어찌하여 미륵의 도를 구하지 않습니까? 석가불께서는 말법3천년 지나 미륵의 도를 만나라 하지 않았습니까.

ㅡ글쎄다 나에게 아직 인연이 닿지 않는구나ᆢ

그리고 말씀을 흐렸다.

나는 문득,

내가 반드시 미륵의 도를 만나리라고 찾으리라고 마음 먹었다.

그러던중  부산 택시 안에서 택시 기사님이 스님과 나를 보면서 자신도 도를 닦는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증산 미륵의 도를 닦는다고 알렸다.

나는 거부감없이 미륵과 증산 이라는 이름이  하나로 느껴졌다.

그 이후 심란한 마음으로 1시간을 기도하던 중 탁탁탁 유리문을 쪼개는 소리에  기도를 마치고 소리가 났던 장소로 가보니 새 한마리가 죽어 있었다.

새의 부리는 어찌나 쪼았는지 부리주위로 피가 맺혀 있었다.

그것은 매우 기이해서 나는 종이에 대방광불화엄경 글자를 써서 새를 감싼 후 땅에 묻었다.

나를 절로 인도했고 산신기도에 통한 스님에게그 일을 말해주자 그 스님은 대번 픽하는 소리로 말했다.

ㅡ나가겠구먼

나는 그말을 흘려들었지만 마음에 자국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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