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와 맞닿은 헉슬리의 유토피아
책을 논하기 전,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1946년에 완성했다. 집필 연도를 굳이 짚는 이유는 현재의 사람이 썼다고 해도 무방한 그의 예언적 시각에 놀랐기 때문이다. 책은 현재가 본의 아니게 닮아있고, 닮을 미래를 그려놓았다. 이 책은 인류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과 같다.
'보카노프스키 처리'를 통해 8개에서 96개까지 싹이 생겨 모든 태아는 완전하게 성숙한 어른이 된다. 최대 96명의 같은 쌍둥이가 생겨나는 것. 그것을 이 세계에서는 발전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처리는 사회 안정을 위한 주요 수단 중 하나라고 여겨진다.
저 내용만 보면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다. 이 세계가 인류를 생성하는 방식이다. 길게 늘어진 유리병 안에서 난자, 정자 주입을 통해 그곳에서 아이가 자란다. 먼저 말해두자면 이곳에선 임신이란 불결로 간주되며 자유로운 성관계가 장려된다. 책의 설명을 빌리자면 '임신은 귀찮은 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한 명의 이성과 사랑하는 일은 멍청한 짓이다. 여러 이성과 사랑을 이어나가는 곳. 탱탱한 피부에 젊음을 간직한 곳, 그곳이 멋진 신세계다.
물론 이 세계 또한 슬프게도 계급이 존재한다. 유리병 속 태아를 생성할 때 낮을 계급을 생성할수록 그에 따라 산소를 더 적게 공급한다. 알파 플러스, 델타, 감마, 최하위 앱실론 등 계급마다 다른 생김새가 부여되고 각기 다른 색의 옷을 입는다.
인류의 생성 방식만 변화했다면 다행이다. 이곳 사람들은 철저히 암시의 지배 아래 살아간다. 본디 생각과 이성을 부여받는 곳. 나는 그것을 조종이라고 부르고 싶다. 끊임없는 유사한 반복 훈련을 통해 아이들은 그것이 본인이 가진 이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계 사람들은 어른이 될 때까지도 훈련과 주입을 통해 계급 내 그들을 둘러싼 테두리 내 자유를 맘껏 즐긴다. 정말 역설적이게도 '자유'를 위해 자유롭지 못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전개된다.
간단하게 핵심 인물 한 명만 소개 보자면, 버나드는 알파 플러스로 최상위 계급에 속한다. 그는 이 세계의 당연한 것들에 의문을 갖고 반대로 행동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따라서 '소마'라는 일종의 심신 안정 약을 복용하는 것을 꺼리고 사람들로부터 기피 대상인 보호구역에 관심을 갖는다.
공동체, 동일성, 안정성 표어 아래 살아가는 세계와 -보호구역은 정 반대였다. 보호구역은 쉽게 말하자면 현재 우리가 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보호구역은 현대 문명사 회보다 과거 원주민 생활에 더 가깝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유사성은 헉슬리가 창조한 세계보다 아직은 과거의 원주민 생활과 현재의 삶이 가깝다는 것이다.
종교, 사랑, 음식을 먹는 방식은 거시적으로 보면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한 사람과 사랑하는 것을 도덕적이라 여기고 종교의 자유를 지닌 것은 가까운 과거와 비슷하다. 앞서 말했듯이 여러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임신이 아닌 하나의 기술을 통해 인간을 생성하며 종교는 천박함으로 여겨지는 곳. 그곳은 현재와 다르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닮은 부분은 어떤 것인가?
"가장 큰 걱정거리는 사람들이 어느 특정한 한 명을 너무 많이 사랑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일이에요. 지금 충성의 대상이 여럿으로 갈라지는 상황이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은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수밖에 없도록 길이 들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너무나 즐겁고 너무나 많은 자연스러운 충동들을 자유롭게 실천하도록 용납되었으므로, 사실상 저항하고 싶은 유혹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불운한 상황에 의해서 혹시 불쾌한 상황이 일어나는 경우라면, 그럼요 소마가 언제라도 현실로부터 휴식을 마련해줍니다. 분노를 진정시키고 적들과 타협을 하고 고통을 오래 견디고 인내하게 만들어주는 소마가 항상 곁에 있단 말이에요."
이 대목이 현재가 닮아가는 미래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에 의해 길들여져 있는 객체는 아니다. 하지만 사회의 도덕적 경계가 허물어져 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문명의 발달로 다양한 의견들을 공유할 수 있으며,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판단할 수 있다.
나는 분명 그렇게만 흘러갈 줄 알았다. 많은 의견을 공유하면서 생각의 다양성을 인지하고 비판 능력이 성장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인터넷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판단력을 상실케 하고 남의 의견이 내 의견인 것 마냥 혼란을 야기한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일어나서 그것을 살피고 자기 전까지 그것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발전이 아닌 역행이 오히려 현재가 닮아가는 미래라고 생각했다.
기업, 크게 나아가 정부까지 몇 번의 조작만으로 손쉽게 사람들에게 생각을 주입시킬 수 있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다수 사람들이 올바른 내용만 포착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정확한 판단 속 이뤄진 결과인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책에서 묘사된 '소마'는 심신에 안정을 갖게 하고 고통을 인내할 수 있도록 돕는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소마'가 분명 있을 것이다. 먼 미래에선 서로 다른 '소마'가 하나로 통합될 것인지 궁금하다. 나의 좁은 지식으론 현재 다수 사람들의 소마는 '스마트폰'이 아닐까 싶다.
치밀히 분석하자면 할 말이 많은 책이다. 그만큼 내포한 의미와 헉슬리의 천리안적 시각에 감탄을 한 부분도 많다. 나는 그중 한 부분에 초점을 맞췄지만 책을 읽었거나 혹은 읽을 예정인 독자라면 다른 시각으로 책을 곱씹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