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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현 Nov 18. 2020

대단한 뜻이 있지는 않았어요

그냥 그렇게 되었어요

왜 안된다고 생각했을까.


디자이너는 너무 많고, 지구에 여행자는 차고 넘치니까 내가 디자이너에 혹은 여행자에 동참해봐야 특별할 것 없다고 생각했다. 인스타그램에서 분단위로 업데이트되는 전 세계 패션 브랜드의 'new arrival'을 보고 있으면 동대문을 뛰어다니다 신발에 차는 땀은 일말의 의미도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매일 새로운 디자인들이 차고 넘치는 데, 도대체 내가 또 하나의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만드는 디자인도 누군가에게 찬사를 받고, 어떤 이들의 소비욕구를 불타오르게 했겠지만 나에겐 그저 버려질 것들의 탄생과 죽음의 짧은 순환처럼 느껴졌다. 퇴사를 했고, 의도치 않게 100일 정도의 동남아 여행을 하게 되었다.

'의도치 않게'라는 말은 퇴사 이주후 출발하는 태국행 편도비행기를 끊은 점, 출발하는 당일 45리터짜리 배낭가방에 짐을 꾸깃꾸깃 싸기 시작한 점, 계획은 하나도 없이 모아둔 돈만 믿은 점 등을 바탕으로 한다.


떠났던 날처럼 돌아오는 날도 사실 계획이 있다기보다는 돈이 떨어져가서 결정한 일이었다. 마지막 여행지였던 양곤에서 집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102일의 여행이 되어버린 이 여행은 뜻밖에도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양곤공항에 앉아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며 한국으로 돌아와 그 시간들을 차곡차곡 기록하여 공유하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이미 여행자는 이렇게나 많은 데 나의 경험이 앞선 이들과 어떻게 다를 것이며, 그 작업들이 과연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으로 여행에서 했던 다짐들을 하나씩 뭉그러트리고 있었다. 시작도 해보지 못한 채 근처만 서성거리며, 어쩌면 조금은 그냥 이전의 생활로 자연스럽게 돌아가길 바라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우연히 여행 산문집을 읽는 데, 문득 생각이 스쳤다. 왜 내가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뛰어나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의미 없다고 생각했을까. 중이병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서 여전히 나는 어딘가 특별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새로운 것, 특별한 것에 대한 집착이었다. 우리는 한 분야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건데, 어째서 순위를 매기고 나는 그 위에 올라서는 것에만 집착했을까.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데 말이다. 마음의 짐들이 마법처럼 공중분해되며 몸이 가벼워졌다. 못나고 서툴겠지만 그것도 내 색깔이니까 실체 없는 두려움은 내려놓고 솔직해지기로 한다. 다음 두려움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또 한동안을 살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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