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각자의 세계에서 산다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 크지 않지만 날렵한 콧날. 지프니에 올라탄 지우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이전보다 조금은 살이 붙은 듯한 모습이지만 단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러버렸다. 지금 이 상황이 현실임을 확인이라도 하듯...
그는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이름이 울려 퍼진 곳을 찾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이 벌어졌다. 방금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지우?” 그의 눈이 반짝였다. 예상치 못한 재회에 둘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볼 사이가 아니기도 했지만 둘의 인생에 각기 놓여있던 10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여긴 무슨 일이야?” 길고 긴 침묵을 깬 건 시훈 쪽이었다.
“그냥... 여행. 너는?”
“나는 출장 왔다가 시간이 나서 잠시 둘러보는 중이야.”
차가 출발하자 열대지방의 후덥지근한 열기를 머금은 후끈한 바람이 밀려왔다. 코를 통해 가슴속으로 빨려 들어가 봄기운처럼 간지러움을 불러들이는
“넌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리후야 광장에 갔다가 바닷가 근처에 가서 밥 먹으려고.” 그녀는 대충 인터넷에서 본 정보로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댔다.
“그렇구나. 여기 얼마나 머무를 예정이야?”
“한 일주일 정도 더 있으려고 해.” 아직 특별한 계획이 없음에도 그녀는 대충 둘러댔다.
“그럼 여행 중에 시간 괜찮으면 한 번 볼까?. 난 삼일 더 있어.”
둘은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리고 머지 않은 학교에서 시훈은 내렸다. 지우는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조그맣게 보일 때까지 바라보았다. 여느 때 수 없이 그랬던 것처럼.
한낮의 뙤약볕은 그녀를 금세 지치게 했다. 얼떨결에 시훈에게 말한 관광지에 도착해 사진을 몇 장 찍고 나니 금방 흥미가 사라졌다. 애초에 관광지 같은 것을 그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주변을 둘러싼 다양한 말을 쓰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편이 더 재미있었다.
고작 잠깐 마주쳤을 뿐인데... 그의 등장과 동시에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선명히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치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은 것처럼.
한 낮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지우는 가까운 곳 눈에 띄는 카페로 향했다. 문을 열자 이 곳은 바깥과는 다른 세상이라는 듯 스산한 냉기를 뿜고 있었다.
아이스 커피를 받아들고 그녀는 시훈의 메신저를 보았다. 김시훈, 프로필 사진은 선글라스를 끼고 하얀 옷을 입은 채 골프를 치는 모습이다.
골프는 그녀의 남편도 좋아하는 취미였다. 드넓은 푸른 잔디, 썬글라스, 눈부시게 흰 옷, 늘 완벽한 의상과 포즈를 갖추기 위해 그는 노력했고 마치 한 번의 공연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한 것처럼 필드에 나갈 때마다 치장했다. 자신만만하게 취한 포즈, 금방이라도 공을 때려 멀리까지 날려버릴 것 같은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진을 볼 때마다 그녀는 그 사진이 정환,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시카는 맥주를 마시며 환히 웃었다. “데츠굿포유, 이츠 어 데스티니.” 스무 살 중반인 그녀는 지우가 묵는 이 작은 호텔의 매니저이다. 아직 앳된 티를 지닌 그녀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딸을 낳았다고 했다. 그 이후로 죽 둘이 살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차가워 보였지만 일주일 가까이 되니 슬 마음을 여는 듯 보였다. 저녁 무렵이 되면 누구나 외로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6일째 되는 날 저녁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맥주를 마시는 그녀를 보았다. 말동무가 필요했던 터라 함께 해도 되겠냐고 묻자 그녀는 여느 때와 달리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자리를 내주었다. 그날 이후로 둘은 종종 저녁 시간에 맥주를 함께 하곤 했다.
제시카는 늘 데츠 오케이라는 말을 달고 산다. 어쩌면 자신에게 하는 말 일지도 몰랐다.
“언제 돌아올 거야?” 남편이었다.
지우는 가끔은 스스로도 자신을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곤 할 때가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정환 같은 사람에게 자신을 내맡긴 건지도 몰랐다.
언제나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는 듯한 모습, 무슨 일이든 답을 내어줄 것 같은 사람.
신혼 초 그들은 완벽한 공생관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균열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벌어지곤 한다.
“내가 이거 여기 두지 말라고 했잖아.”
“어, 미안. 그런데 자기도 어제 그냥 거기 뒀었잖아.”
“그건 결국 내가 치웠잖아. 네가 둔 건 지금 내가 치우잖아.”
그는 그녀의 사소한 건망증과 덤벙댐을 지적했고, 그녀는 그의 완벽주의을 힘들어했다.
그는 사사건건 그녀의 모자람을 이야기했다.
몇 달 전 정환의 대학동기 모임이었다. 그녀가 고기를 굽다 맥주잔을 엎질렀다. 그것은 테이블을 순식간에 뒤덮으며 그들 쪽으로 흘러내렸다. 테이블 위에서 뚝뚝 떨어지는 거품 머금은 액체가 그들에게 돌진했다. 불행의 쓰나미였다. 둘의 바지가 흠뻑 젖자 정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린애도 아니고 매번 이게 뭐야. 볼썽사납게.” 일어서서 바지를 털어내며 그가 소리쳤다
친구들의 난감한 얼굴이 점차 동정으로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지우는 얼굴을 붉혔지만 반박할 수 없었고 그녀는 점차 그의 앞에서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고 말을 아꼈다..
‘나는 나를 감당할 수 없어서 이 사람에게 맡긴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도 나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한다.’
거실 벽에 환하게 웃고 있는 결혼사진을 보며 지우는 생각했다. 사진 속의 둘은 완벽한 미소를 띄고 웃고 있다. 7년간의 결혼 기간이 그녀에게 안겨 준 것은 몇 년간의 안정과 몇 년간의 끈질긴 싸움, 그리고 결국에는 그들이 사랑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감정이 끝나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한때 지우는 그들을 반씩 빼닮은 아이를 낳으면 나아질까 하는 생각을 했던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그녀에게는 여의치 않았다.
시훈과 만나기로 한 스타벅스에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어디에서나 스타벅스는 스타벅스다. 안락하고 편안하다. 날이 더운데도 야외에 앉은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스 음료와 케익을 앞에 두고 핸드폰을 들여다 보고 있는 그들의 머리 위로 탐스러운 식물의 잎이 흐드러져 있었다. 그녀는 가장 구석의 소파 자리에 앉았다. 시원한 통창으로 이름모를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는 걸까. 그들의 바쁜 걸음 뒤로 뜨거운 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때 시훈의 모습이 나타났다. 조금 살이 찌고, 세월의 기색이 보이지만 이전의 발랄함은 그대로 인 듯 보였다.
도착한 시훈은 지우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웃으며 손을 덥석 잡았다. 당황한 그녀는 얼른 손을 재빨리 빼냈지만 이내 볼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발그레 해진 얼굴을 숨기려 괜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열대 나무의 무성한 잎들이 하늘을 향해 춤추고 있었다.
“아, 미안. 너무 반가워서.” 시훈은 커피를 들이켰다.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돼?”
호기롭게 떠나왔지만 막상 도착하니 외롭고 적적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볼까 하던 생각도 있었다.
“특별히 정해 두진않았어”
“즉흥적인 건 그대로구나.”
“그럼 우리 삼 일정도 같이 여행할까?”
시훈이 땀을 닦으며 지우를 곁눈질로 쳐다본다.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짓는다. 지우는 부정도 긍정도 아닌 어색한 대답을 내뱉었다.
“글세...”
“어디부터 가볼까?. 시티몰 가봤어? 티아이리조트는? 여기 오면 꼭 망고크랩을 먹어봐야해.” 시훈이 지우에게 이곳의 사소한 정보들을 알려주었다. 현지인만 안다는 맛집과 볼거리 같은 것들도.
“우와, 되게 잘 아네. 여기 자주 오나 봐?”
“어. 사업 때문에. 궁금한 것 있으면 말해. 갑자기 아프다거나 할 때 연락하고.”
“사실 난 그냥 머리 식히러 온 거라서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은 없는데... ... ”
“그래? 그럼 알맞은 곳을 내가 알지.”
시훈은 지나가는 트라이시클을 잡았다. 트라이시클 기사와 솜씨 좋게 흥정을 하곤 곧장 탔다. 뜨거운 날씨였지만 그늘 아래서 달리기 시작하니 미지근한 바람이 열기를 식혀주었다.
오토바이를 타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시훈과 지우의 옆으로 가게와 집, 사람들이 지나갔다. 10여분을 달리니 점차 건물이 사라지고 들판이 나타났다. 더위는 아랑곳 앉는 듯 염소와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었다.
조금 더 달려 도착한 곳은 한적한 바닷가였다. 인적이 드문 고요한 바다 빛은 몽환적이었다. 햇빛에 반사되는 하얀 모래사장, 밀려오는 파도에 끝없이 반짝이는 에메랄드 색. 과연 시훈의 말처럼 아름답고 고요한, 누구라도 좋아할 만한 곳이었다.
무수히 밀려오는 파도 자락 사이로 그들의 과거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여기까지 왔는데 발이라도 안 적셔 볼래?
지우는 끈적한 바닷물이 싫었다. 젖은 발에 덕지덕지 달라붙는 모래도 싫었다. 하지만 시훈의 제안에 살짝 발만 담가 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시원한 물살, 발바닥에 알알이 새겨지는 모래와 발등을 간지럽히는 물살이 나쁘지 않았다.
엇, 세찬 파도가 밀려오자 피하려다 몸이 휘청거렸다. 순간 시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렇게 둘은 손을 붙잡은 채 조금 더 바닷길을 걸었다.
“쏘 왔아유 고잉투두?” 제시카가 눈을 빛내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의 도피성 여행, 시훈과의 러브스토리와 재회를 알고 있는 사람. 제시카는 그녀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자 타인이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이돈노우. 아이돈노 왓투두.”
“아이띵크 유어 인러브.”
사랑이라... 둘은 그것을 오래전에 했었다. 그런데 결국 끝나버렸고 그보다 훨씬 긴 시간 서로가 마치 세상에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살아왔다. 끝나고 깨어진 사랑이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이윽고 지우는 자신의 문제에 다다랗다. 자신의 문제가 우선이었다. 남편과 헤어질 것인가. 아니면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사실 모든 것은 스스로의 문제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매번 감정적이 상하는 쪽은 지우였고 정환은 아무렇지 않았으니까. 애정을 갈구하는 것도, 마음이 상하는 것도, 둘의 관계에서 무언가가 부족하다 여기는 것도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어쩌면 그게 그들의 문제였다.
[오늘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만나겠다. 미안.]
시장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무조건 그곳의 시장에 가봐야 한다고, 그곳의의 혼란과 생기, 그 혼돈 속에 존재하는 삶을 목격해야 비로소 그 곳에 다녀온 거라는 시훈이 말이었다. 여느 때 보다 이른 아침 일어나 샤워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있던 그녀에게 도달한 메시지에 지우는 갑자기 막막해졌다.
“괜찮아. 내일 가능하면 연락 줘.” 하지만 혼자 덥고 복잡한 시장에 갈 생각을 하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사실 관광지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호텔 방에 돌아와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갑자기 텅 비어버린 시간이 늘어진 듯 느껴 졌다. 이 끈적한 더위와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거리, 관광객에게 바가지나 씌우려고 접근하는 호객꾼들이 지긋지긋해졌다.
지우는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검색해 보았다. 답변하지 않고 남겨두었던 정환의 메시지를 다시 열어보았다.
[언제 올거야?]
마치 잠깐 외출한 사람에게 보낸 듯 간결한 메시지, 역시 정환다웠다.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 우리한테. 그녀가 떠나오기 전 주말 아침 갑작스레 그에게 꺼낸 말이었다. 핸드폰에서 잠깐 눈을 뗀 그의 대답은 역시나 간결했다.
“얼마나?”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그의 스타일이다. 그녀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듯 쿨한 태도. 스스로가 배려라고 말하는 그런 모습이 지우에게는 무관심이었다.
“글쎄, 가봐야 알 것 같은데. 자기는 우리말이야. 정말 지금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해.?”
“난 특별히 좋지도 않지만, 딱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다들 이렇게 살지 않나.”
지우는 덧붙이려던 말을 삼켰다.
낯선 나라의 침대에 홀로 누워 있으니 더욱더 외로운 생각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타지의 골방에 아무도 모르게 드러누워 있어야 한단 말인가? 친숙한 물건들이 없으니 가슴속이 더욱더 휑하게 느껴졌다.
한때 지우는 자유를 꿈꿨다. 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일에 얽매이지 않고 점심값 만원에 근심하지 않는 삶. 바로 지금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하지만 지우는 지금 자신이 여느 때보다 불행하다고 느꼈다.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그녀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을 채운 수없이 많은 잡념을 떨쳐 버려야만 했다.
“마담, 웨얼아유고?” 호텔을 나서자마자 지나가는 트라이씨클 기사가 말을 걸어온다. 무작정 나와 걷기 시작한 지우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채 오 분을 걷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택시를 잡지 않은 것을 후회하던 그때 그녀에게 다가온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조금 비싸더라도 타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우머치? 기사는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들어올렸다.
지우가 알기로는 조금 비싼 가격이었지만 그래도 납득할 만한 부분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를 띈 기사는 그녀에게 자신의 옆자리를 닦아주며 앉으라 손짓한다.
포근한 바람, 자신의 옆을 스쳐지나는 풍경들, 길을 걷는 사람, 웃통 벗고 자는 사람, 오토흙바닥 위에 널부러진 개, 그 옆에 쌓여 팔리길 기대하는 빵, 난잡한 간판들. 이런 카오스.
시훈이 말한 복잡함 속의 삶이란 이런 것일까.
해변이 가까워질수록 지우의 머릿속은 산뜻해졌다. 달리는 트라이시클에서 기억을 하나씩 길 위에 떨어트리며 온 것 같았다.
바다가 눈에 보이자 드디어 지우는 기억해 냈다. 자신이 이 곳에 오게 된 이유. 제멋대로 흘러가는 삶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에서는 도무지 자신이 방향을 바꾸지 못할 것 같았다. 파도에 휩쓸린 사람처럼...
잊고 지냈던 꿈과 사랑이 존재하는 삶, 지난 날들이 오늘을 위해 겪어야 할 통과의례처럼 여겨졌다. 수 많은 풍경과 과거를 달려 트라이시클은 목적지에 다다랐다.
“오케이, 히얼. 파이브달러스 플리즈.”
“왓? 이츠투 익스펜시브.” 아무리 어리숙해보이는 관광객이지만 그녀도 터무니 없이 비싸다는 것 쯤은 안다. 택시요금의 두 배다. 아까 두 개라고 하지 않았냐고 되묻자 기사는 온화하던 표정을 싹 바꾸고 이야기한다. 흥정을 해보라는 눈치다. 오케이, 그녀가 손가락 두 개를 들어올리자 그는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아임 헝그리, 아이 헤브투 잇. 아이라이드, 유 니드투 페이. 그가 더는 안된다는 손짓으로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인다.
실갱이 하기 싫어진 그녀는 그의 말대로 네 장의 지폐를 던지듯 건네주고 만족한 듯 그는 그를 받아 챙긴다. 일례의 따듯한 미소로 그녀에게 살갑게 말한다.
땡큐 마이프렌즈.
지우는 불쾌한 마음이 들었지만 얼른 내리고 잊어버리자 했다. 한 발을 내리고 한발은 아직 트라이시클 계단에 걸쳐 있던 찰나 트라이시클은 바삐 출발했다. 위잉 소리와 함께 그녀는 내던져 지듯 콘크리트 위로 쳐박혔다.
“오마이갓. 왓아유 두잉.” 소리쳤지만 이미 멀어져가는 트라이시클 기사는 그녀가 떨어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왔던 것 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지우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깨져 피가 흥건한 무릎을 감쌌다. 턱도 아프고 몸이 아파 왔다.
젠장. 망할 놈의 여행. 내일 당장 돌아간다.
지우는 아픈 무릎을 절뚝거리며 근처에 앉았다. 손바닥도 까졌고 턱 밑으로 피가 나는 듯했다. 입에서는 쇠 맛이났다. 근처에 앉아 마음을 추스르자 스스로가 처연했다. 핸드폰을 켜 택시를 불렀다. 조금 후 도착한 택시에 앉자 기사가 백미러로 흘끔거리며 물었다.
“아유 오케이?”
“예, 오케이.” 괜찮다고 말하며 얼굴을 쓰다듬은 그녀 손에 피가 묻어났다.
숙소로 돌아와 거울을 보니 턱이 까진 곳은 어느 정도 지혈이 되었지만 앞니가 덜렁거렸다.
“데츠낫오케이.” 처음으로 제시카의 입에서 낫오케이라는 말이 나왔다.
아, 나는 왜 이럴까. 이상하게도 정환의 모습이 아른거려 눈물이 울컥 올라오려 했다. 그가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방에 틀어박혀 있던 지우는 핸드폰만 쥐고 있었다. 끝내 시훈의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조금 다쳤다고, 먼저 연락해 볼까 망설이다 이내 관두었다.
그 누구라도 자신을 찾길 바라는 지우에게 마침내 메시지가 도착했다.
“미안해.” 정환이었다. 난데없는 사과에 참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어쩌면 바닷속 해초처럼 너풀거리는 그녀의 마음은 정환 같은 사람이기에 감당 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지우는 이불을 덮어 쓰고 소리내어 한참을 울었다. 울고 또 울다 잠이 들었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 가장 잘 잤다.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다. 어젯밤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듯 느껴졌다.
제시카가 피곤한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굿모닝. 아유오케이?
지우는 어젯밤 빠져버려 텅 비어버린 구멍을 보이며 밝게 웃었다. 하이, 굿모닝.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큰 소리로 웃었다. 이가 빠진 자리의 구멍이 훤히 드러나 시원하게 느껴졌다.
비행기에 오른 지우는 자그마한 창으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작열하는 태양, 흙먼지와 초록잎이 가득찬 곳, 아마 그녀는 두 번 다시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핸드폰을 들어 얼굴을 비춰 웃어보았다. 흉하게 보였지만 왠지 그녀는 바보 같은 미소가 싫지 않았다. 이윽고 기체가 흔들리며 이륙할 준비를 했다.
그녀의 아래로 뜨겁고 푸른 대지가 가라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