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햇살이 비쳐 드는 실내에 감미로운 피아노곡이 재생된다. 홈 관리시스템 인공지능 퍼미(per me)가 조도와 온도를 조절하고 머신에서는 향긋한 커피 향이 매일 같은 시간 실내를 채운다.
어느 하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무언가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전까지는... 그것은 떠오르지 않는 희미한 형상으로 요즘 들어 부쩍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안간힘을 쓰며 간밤의 좋지 않은 꿈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찝찝함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
‘오늘 10시에 본사 미팅이 있습니다’
퍼미의 안내에 그녀는 생각을 관두고 샤워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줄기가 몸을 감싸자 산란히 머릿속을 떠돌던 잡념들이 수증기와 같이 욕실 천장으로 솟구쳐 이내 사라진다.
‘휴...’ 월에 한번 꼴로 있는 회의는 피할 수 있다면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다.
그녀의 이름은 우연, 인연도 아닌 우연은 넉넉할 우에 인연 연을 써 아빠가 지어준 이름이다. 우연은 커피 한 잔만 빈 속에 밀어넣고 퍼미가 대기시킨 자율주행 택시에 올라 창밖을 바라본다.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한 거리에는 수행 로봇들만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인류가 비주류가 된 듯한 거리, 우연은 오늘 만날 얼굴들이 떠오르자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녀 역시도 이런 류의 사람들을 대면하는 것보다는 로봇이 편할 때가 많았다. 허나 단지 편하다는 것뿐이지 로봇 찬양론자는 아니었다. 휴머노이드건, 로봇이건 그저 물리적 도움을 받는 기계일 뿐이라는 입장은 로봇 하드웨어 제조자 입장으로 고수하는 그녀의 철칙과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출근하는 공장지대와 달리 상업지역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한 모습이다.
우연은 이런 건물을 들어설 때마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생긴다. 의식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옷매 무새를 가다듬은 후 건물로 들어섰다.
10층,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발광하는 전광판에는 미니멀한 회사 로고가 번쩍인다. 옆으로 회사에서 출시한 인류로보의 다양한 모델들이 전시되어 있고 좌측으로는 사장실이 맞은편에는 회의실이 위치했다.
회의실에는 소프트웨어 개발팀 임대리가 가장 먼저 도착해 있었다. 어색한 고갯짓으로 인사를 나누고 그녀는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스크린에는 화상참가자들의 얼굴이 띄워져 있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같은 팀 이과장이 들어왔다. 오늘의 참석자 여섯, 화상 참석자 다섯, 길어봤자 한 시간 남짓이면 끝날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역시나 사장은 자신을 위해 사람들을 대기 시켰다. 회의시작 시간이 지나도 다들 묵묵부답이었다. 이십분가량 지나고서야 사장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마치 자신만을 위해 깔린 무대로 진입하듯이... 기다리던 관중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목례를 했다.
화상참가자 중 몇몇은 AI를 통해 프레젠테이션을 진행 시켰다. 사장은 그런 것들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으나 굳이 꼬집어 무어라 하지도 않았다. 곧이어 2분기 매출 그래프와 팀별 성과가 도식화되었다. 이는 곧 사장의 주관적인 평가, 이를테면 회의 참석과 같은 성실도와 함께 다음 달 급여에 반영될 것이었다. 우연의 바람대로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의례적인 미팅이 끝났다.
“이렇게들 모였으니 커피 한 잔씩 들고 가게. 비즈니스적인 수치는 아까 봐서 알겠지만 나름대로 괜찮았어요. 하지만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우리도 계속된 혁신을 통해 회사를 키워나가야겠지요. 프로그램 하나가 세 사람 몫은 족히 한다는 사실 잘 아시죠?”
곧 회사에서 출시 예정인 신형 가사로봇이 커피를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테이블에 잔을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레 놓는 움직임은 여느 고급레스토랑의 웨이터를 방불케 하는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사장은 모두에게 커피가 서빙되는 것을 기다린 후 말을 이어갔다. 본론은 이제 시작이다.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커피를 바라보았다. 맑고 검은 물에 자신의 얼굴이 일렁거렸다.
“이 커피 한 잔, 이 한 잔이 내가 자네들 같은 나이인 30년 전에도 지금처럼 오천원이었다면 믿어지나요? 지나치게 비인간화된 사회다, 주객전도다 해도 AI, 로봇 기술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했어요. 요즘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방금 저 휴머노이드 봤죠? 이게 가게에 깔리면 제 아무리 오랜 경력의 웨이터라도 못 당해. 화장실도 안가, 실수도 안 해, 고객이 어떤 말을 해도 눈살 한번 찌푸리는 일 없지... 하지만 아무리 효율성이 중요해도 내가 여러분을 고용하는 것은 사람을 위해서 돈이 쓰여야 한다는 거야...”
은근한 압박, 아니 협박성 멘트다.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강 배전하여 무겁고 진한 향이 오랫동안 입 속에 맴돈다. 지극히 사장의 취향이 반영된 머신 값, 사소한 개인의 취향 하나까지도 수치화되어 완벽하게 누릴 수 있는 삶은 사장의 말마따나 현대 기술의 수혜, 어쩌면 기적일지도 모른다.
“임대리, 본사 회의 참석은 처음이지? 앞으로 알아 갈게 많을 거야. 커피 맛은 좀 어떤가? 이거 원두도 인도네시아에서 매주 직수입하는 원두야.” 사장이 임대리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글쎄요. 전 그렇게까지 특별한 줄은 모르겠습니다.”
“에이, 이 사람아. 아무리 커피를 모른다고 해도 그렇게 모르나.이건 향부터 다르잖아. 풍미가 남다른데요?” 눈치 빠른 이과장이 재빠르게 끼어든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내지.” 언짢은 듯한 사장이 말을 내뱉기 무섭게 끼이익 의자를 끌며 임대리가 먼저 일어났다. 그는 사장을 향해 고개를 까딱하고 유유히 회의실 문을 나섰다.
순식간에 회의실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침잠한 공기가 그들을 짓눌렀다. 침묵을 깨고 사장은 혼잣말을 흘렸다. “로봇들을 쓰면 일도 잘해, 돈도 덜 들어. 그런데 재미가 없단 말이야. 인간들처럼 미친 짓을 안 하거든...” 사장은 우연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왠지 모를 혐오감이 일렁였다. 우연은 그런 그의 동조를 바라는 말투가 부담스러웠다.
“에휴, 고생했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잠깐이니까. 돈값이라고 생각해야지.” 매끈한 피부가 잘 구워진 도자기 같이 보이는 진의 얼굴은 오늘따라 빛이 났다. 미간에 요즘 유행하는 필러를 맞았다나. 동갑내기인 둘이지만 관리 때문인지 15년간의 세월 동안 둘의 시간은 달리 흘러간 듯하다.
“그 한 시간이 한 시간 같지 않은게 문제야. 후유증이 너무 심하다니까. 며칠 전부터 회의 생각만 하면 잠도 안오고... 진짜 싸이코 같아.” 우연이 문득 생각난 듯 진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 우리 중학교 때 기억나? 내가 요즘 이전 기억이 도무지 안나는데, 그게 딱 중학교 삼학년, 내가 막 전학가던 해. 그때더라구. 이상한게 그 전도 그 이후도 기억이 나는데 그 이 년만 실종된 것 같아. ”
“누가 일일이 옛날 일 기억하고 사니. 오늘 살기도 바쁜데.” 진이 앞에 놓인 조각 케익의 허리를 포크로 툭 자르며 말했다. 진득한 치즈가 일품인 치즈케이크는 반으로 댕강 쪼개지며 부스러기를 떨궜다.
“아니, 요즘 들어서 내가 이상한 꿈을 꾸는데 그게 너무 생생해서 실제로 있었던 일 같단 말이지. 그런데 일어나서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도무지 기억이 안나. 분명 익숙한 장소, 익숙한 사람들이 나온 것도 같고. 이전의 기억이 잘려있으면 문득문득 내가 누구였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게 메모리 백업 프로그램 부작용이라는 말들도 있던데”
“얘는 참 할 일도 없다. 오래된 일들은 다들 그렇게 잊고 살아. 난 오래된 과거들이 다 전생같이 느껴진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레모네이드가 담긴 컵을 드는 그녀의 손톱에는 화려한 큐빅이 장식되어 있다.
“맞다. 너 소개팅 받지 않을래?”
“나 그런 것 불편해서 안 하잖아. 나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쓸데없는 생각 많아질 때는 외로워서 그런 거야. 삶이 심심하고 무료할 때는 연애가 필요하다니까. 꾸미는 것도 재밌고, 쇼핑하고 데이트해야 하니까 돈도 더 벌어야 하고, 너 여행 좋아하잖아. 이 남자 취미가 여행이래. 사실 나한테 들어온 소개팅인데 난 연하는 별로라.”
“나도 여행가는 건 별로 안 좋아해. 그냥 체험프로그램 돌리고 남들이 다니는 것 편하게 보는 게 훨씬 나아.”
“그래? 아무튼 알겠어. 혹시 마음 변하면 말해. 넌 너무 집에만 있어. 그러니까 잡생각이 계속 들지. 아침에 우리 수영장 나올래?”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삶의 지평이 넓어질 수 있다는 진의 세상은 얼마나 다채로운 일로 가득 차 있는가, 반짝이는 손톱과 광이 나는 콧대, 그녀가 바라보는 아름다운 세상.
문득 우연은 진과 자신이 같은 세상을 사는 것이 맞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늘 오후 2시 30분, DOT 정병원 정신의학과 상담 예약이 되어있습니다. 미세먼지 수치 나쁨, 기온 영하 5도, 바깥 활동 부적합, 화상 진료로 변경하시겠습니까?’
“아니, 갈 거야.”
‘택시를 예약하겠습니까?’
“아니, 걸어서 갈게. ”
‘오늘 미세먼지 수치는 바깥....’
“그만”
요즘 들어 심해진 불안증세에 그녀는 두 달째 화상상담을 진행 중이었다. 차도가 없자 담당의는 우연에게 방문 진료를 권했다. 부연 거리를 걸으며 우연은 다음 달에는 고분고분한 비서 같은 신형을 구매하겠다고 생각했다. 삼 년째 사용 중인 퍼미는 요즘 들어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평소에는 뚜렷이 보일 멀리 산 위의 송전탑이 안개 속에 자취를 감춰 뾰족한 꼭대기만 수면 위의 가시처럼 솟아 있었다. 걸음이 빨랐던지 예약 시간을 이십분이나 앞두고 병원에 들어섰다. 대기실은 주광색 조명이 드리워져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되도록 만들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내부에는 데스크, 의자, 조명 어느 하나 각진 것이 없는 둥근 곡선으로 디자인된 가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느낌을 보자면 거대한 생물의 안전한 자궁 내부 같은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궂은 날씨 때문인지 대기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안락한 내부는 혼란 그 자체였다.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지껄이다 이내 버럭 소리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사람도 있었다.
우연은 최대한 그들로부터 먼 복도 끝 벤치에 앉아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그녀에게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살짝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각자 자신의 세계에 빠져있는 사람들 뿐.
신경과민인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헛웃음을 지으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어떤 눈과 마주쳤다. 금방까지 없었던 한 사내가 어느 순간 그녀의 시야에 불쑥 나타나 있었다.
그 남자는 한치의 감정도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쿵쾅대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북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우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른 곳을 보는 척 곁눈질로 그 남자를 바라보니 여전히 그는 그녀만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마저 띄우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보는 척했다. 이내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었다. 발소리는 정확히 그녀를 향해 버젓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어나서 자리를 옮길까? 아니면 그냥 집에 갈까?’ 바닥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야에 검정 운동화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너도 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의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 ...”
“그래서 왔잖아.”
“... ...” 고개를 들자 그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깊고도 서늘한 눈빛이었다.
“이우연님 들어오세요”
그때 그녀의 이름이 호명되었고 우연은 소리에 끌려가듯 재빨리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지난 몇 번 보았던 화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검정테의 안경을 낀 세련된 인상의 40대의 여의사는 부드럽게 상담을 이어갔다. 우연은 무언가에 홀린 듯 의사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이상한 기분이 점점 심해진다는건데... 혹시, 근래에 충격을 받는 일이라거나, 생활에 변화가 있었다거나 하는 특별한 사건이 있으셨나요?”
“글쎄요... 무섭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특별하다면 특별하겠네요.”
그녀는 방금 대기실에서 본 사람들을 떠올리며 자신이 정신과에 진료를 보러 다닐 만큼의 문제가 없는 사람임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그것은 은연중에 마음속에 피어오르던 자기 불신을 잠재우는 묘한 안도감이었다.
“그래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고 잦아지니까, 일단 매주 방문하는 걸로 하시죠.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꾸준히 문제가 되는 상황에 노출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주변인들에게 상담하는 사실은 알리셨나요?”
“알려야 하나요?”
“그럼요. 주변인들에게 알리셔야 일상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평소와는 다른 행동 같은 것도 알아챌 수 있구요.”
우연은 선뜻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단 하나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럼 다음 주에 뵐게요.”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그녀는 순간 회사에서 줄곧 생산되는 인류형 로봇이 떠올랐다. 매끈한 피부, 좀처럼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
상담실을 나온 우연은 자신도 모르게 아까의 그 남자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도 그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우연의 기억은 선명하다가 흐릿해지다 갑자기 뚝 끊긴 다리처럼 어떤 지점에서 멈춰있다. 끊어진 다리 앞에서 저 멀리 동떨어진 자신의 어린 시절을 건너다 보았다.
끝없이 돌아가는 작업 벨트를 바라보며, 우연은 생각에 잠겼다. 같은 모양의 팔, 다리, 목, 머리, 그리고 그것들이 조립되면 하나의 로봇이 된다. 한 공정을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휴머노이드는 점점 제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다. 완성된 ‘그것’은 각각의 임무와 AI프로그램을 부여받고 적합한 소프트웨어가 깔려 필요로 하는 곳에 보내졌다. 딱 필요한 만큼만의 지능과 기능. 그것이 이 존재들의 가치다. 이곳에도 그렇게 완성된 로봇들이 공장의 제반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다. 그녀가 할 일은 기계가 만들어낸 부품을 로봇이 제대로 작업했는지, 프로그램상의 오류는 없는지를 검수하는 것으로 오만분의 일 수준의 오류들은 사실상 그녀의 업무라는 책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인류형 로봇이 등장할 때만 해도 기대감을 넘어 경외심까지 가졌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자 로봇은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인프라가 되었고 자동차나 휴대폰처럼 그저 필수품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그들에게 부여된 지능과 인간 응대로봇의 감정프로그램에 대해 우려하는 말들도 있었지만 ‘유사정서프로그램’은 언제나 복종하고 헌신하는 그들에게 인간적 호감까지 느끼도록 설계되었다. 특히나 로봇은 물리적, 정신적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 죄책감 없이 부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점이었다.
불평 없이 불편을 받아내는 로봇은 누구도 원치 않는 분야의 노동에서 인간의 해방을 의미했으니까. 다들 말했다. 전례 없이 좋은 시절이라고...
딩동댕 딩동, 귓가를 울리는 멸종된 초인종 소리, 엄마가 고수하는 삶의 방식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고루하다.
“엄마, 나왔어.”
“연락도 없이 갑자기 얘가 웬일이야.”
“요즘 누가 이런 구식 초인종을 써.” 생체인식도 등록되어 있지만 우연은 독립 후에는 엄마 집을 방문할 때 늘 초인종을 눌렀다. 엄마는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소파 테이블에는 반쯤 비운 커피잔 하나와 아예 새 것 인채로 식어가는 커피잔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아빠랑 이야기하고 있었어.”
“딸, 오랜만이다. 요즘 어떻게 지냈어?”
그녀는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한참 바라보다 버튼을 눌러 화면 속의 아빠를 지워버린다. 엄마는 겸연쩍은 듯 시선을 돌렸다.
우연은 아빠를 대신하는 AI를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빠가 죽기 전 엄마는 나름대로 잘나가는 뇌과학 연구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엄마는 그 협소한 뇌의 미로 속 어딘가에 머무는 듯 집에만 있었다. 어쩌면 오래 전 아빠가 떠날 때 엄마의 본질도 함께 떠나버린지도...
“뭐 좀 마실래?” 부엌으로 황급히 향하는 엄마의 뒷머리가 휑했다.
엄마가 아빠의 메모리를 이용해 AI를 만든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그저 보고 싶을 때 꺼내 볼 수 있는 영상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런 건 흔하니까... 하지만 망자 AI서비스는 업데이트를 거듭하고 거듭하여 소멸된 존재를 창조하여 동거하는 수준에까지 이른 것이다. 실제로 휴머노이드 로봇에 프로그램을 입혀 함께 사는 사람들도 등장할 정도였으니, 부활이라고 해야 하나... 엄마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 것이 우연에게는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화면 속의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이 엄마의 일상을 점차 차지하고 나서부터 우연은 왠지 엄마의 집을 찾는 것이 불편해졌다. AI아빠는 간혹가다 말끝을 흐리며 음... 하고 말을 먹어버리는 습관도, 용건 없이 상대를 말없이 응시하는 버릇도 그대로여서 가끔은 그가 낡아버린 육신을 버리고 그냥 거처를 모니터 안으로 옮겨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우연이 기억하는 그는 오랫동안 아팠던 모습이기에 지금 화면 속의 존재가 엄마와 결혼했던 그 남자와 더 닮아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연의 기억 속 아빠는 수척한 얼굴에 병자 특유의 힘없는 표정, 그리고 늘 그녀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모습뿐이었으니까.
엄마는 커피 한 잔과 사과파이를 들고 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엄마의 요리는 이전의 맛을 잃어갔지만 사과파이 하나 만큼은 기억 속의 맛과 다를 바 없었다. 이 맛에 길들여진 그녀에게 시중에 파는 것은 너무 달게 느껴졌다.
“우와, 오랜만이네.”
파이를 한 입 베어 물자 달콤함이 그녀의 머릿속의 불쾌감을 누그러뜨렸다. 하나를 집자마자 맛있게 먹어 치운 우연은 말했다.
“엄마, 사실 나 요즘 정신과 상담을 하고 있어.”
“왜? 어디가 안 좋은 거야?”
“아니 그렇게 심한 건 아니고, 그냥 밤에 잠을 통 못 자고 해서 피로감이 쌓인 것 같아.”
엄마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는 것을 의식한 우연은 최대한 가벼운 증상으로 변명하듯 말했다.
“엄마, 그런데 나 중학교 때 말이야. 그때 혹시 무슨 일 때문에 갑자기 이사했는지 궁금한데.”
“다 네 아빠 치료 때문이지. 할 수 있는건 죄다 해보려고 아둥바둥 할 때였으니까. 결국 이렇게 갈 줄 알았으면 힘들게 하지만 말고 좋은 추억을 많이 남길걸...” 엄마는 나쁜 꿈이라도 떨쳐낼 듯이 고개를 뒤흔든다.
엄마의 단호한 말투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오후의 빛이 드리워 정확히 그녀의 얼굴을 반으로 가른 음영 때문이었을까? 우연은 괜한 말로 엄마의 상처를 후빈 것 같아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굳어진 엄마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니 황량한 거실 가운데 생명력을 뽐내듯 화분에는 진분홍색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제라늄. 그녀가 기억하는 한 옛날부터 엄마가 키우던 화분 종류였다. 오로지 모노 톤이 가득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화사한 것, 엄마의 베란다에는 똑같은 제라늄 화분이 다섯 개가 있다. 그중 꽃이 가장 잘 피어있는 화분이 돌아가며 엄마의 거실을 차지했으므로 거실의 제라늄은 늘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오늘 오후 3시, DOT정병원 예약이 있습니다’일주일이 지났다. 우연은 병원 대기실에서 본 얼굴들을 떠올렸다. 현실과 비현실 어딘가를 헤매는 듯한 사람들.
육체와 정신의 공간이 합의를 이루지 못한 그들과 자신은 정말 다른 걸까.
오늘의 의사는 눈가에 주름이 도드라져 중년의 티를 내고 있었다. 일주일 만에 10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듯이 조금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우연 씨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고요?” 의사는 그녀의 진료기록을 천천히 들여다본 후 뜸을 들이며 말했다.
“저번 주 진료기록엔 그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그 생각은 언제 시작된 거죠?”
“음...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불현듯 아침에 일어나면 무언가가 삶을 옥죄어 오는듯해요. 머릿속을 떠다니던 모호한 불안감이 어떤 예감으로 변하고 그 예감은 마치 예견처럼 느껴져요. 그런 믿음이 쌓이면서 점차 확신으로 굳어지는 것 같아요. 그럴 때는 답답함을 넘어서 미칠 것 같아요. 머릿속에 깊은 안개가 드리워진 것처럼요.”
“우연씨 말처럼 과거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하나의 불안감으로 다가올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보통은 이렇게까지 심하게 일상에 영향을 주지는 않거든요. 기억나는대로 꿈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요?”
“그게... 매일 아침 깨기 전에... 누군가 절 쫓고 있고 전 쫓기는듯해요. 가까스로 눈을 뜨는데 눈을 뜨면 머리가 무언가로 꽉 찬 것처럼 무거워요. 마치 누군가 제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것처럼... 혹시 들리는 말로는, 메모리 백업 프로그램 부작용일 수도 있다던데... 그럴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그런 소문이 있기는 합니다만 사실이 아닙니다. 의학적으로도 그런 가능성과 관련하여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기억력 감퇴와 해당 프로그램의 상관관계는 전혀 없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오히려 가능성을 보자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뇌의 일부가 비활성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부 의견도 있지만요. 처방받은 약은 잘 드시고 계시죠? 무의식 치유도 함께 진행해야겠군요. 나가시면서 수면키트 받아 가시고 당분간 취침하실 때 매일 착용하고 주무세요.”
말을 마친 의사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언가를 열심히 타이핑했다.
복잡다단한 그녀의 증상은 간결하게 압축되었다.
‘원인불명의 두통과 불안장애’
우연은 무거운 진료실의 문을 버겁게 열고 나왔다. 문 하나가 무거운 경계를 가른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듯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고 그 무의식 같은 공간은 그녀가 문을 나오는 순간 꿈처럼 사라져 버린다. 우연이 나가고 두터운 문이 천천히 닫기자 의사는 고개를 왼쪽으로 갸우뚱하고는 수화기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이미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여러 가지 생각에 떠밀린 그녀의 의식은 병원 문을 나서며 스산한 바람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계절은 이제 곧 여름일 텐데도 바람은 제멋대로 스산하게 불었다.
“역시, 여기선 모르지?”
그 남자였다. 기다렸다는 듯 불쑥 말을 걸어온 그는 오늘은 매우 정상처럼 보였다.
미심쩍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우연을 이끌었던 건 정말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우연을 앞장섰고 좀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깔끔한 옷차림에 뒤로메는 검정색 백팩, 그날처럼 자세히 눈을 들여다 보지 않는다면 어딘가 수상해 보이는 구석은 없는 남자다. 그를 따라 도착한 곳은 출근길에 늘 지나치는 대로의 골목의 작은 커피숍이었다. 매일 지나치는 곳인데 불과 몇 미터 안은 아예 다른 지역처럼 느껴졌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골목은 인적도 치안 로봇도 눈에 띄지 않는 곳이어서 대낮임에도 왠지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낡은 간판이 눈에 띄지 않는 카페에 들어선 그는 망설이는 기색 없이 제일 구석의 자리로 가서 먼저 자리를 차지했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자리에 앉자 그가 대뜸 말했다.
“나 진짜 기억 안 나?”
“글쎄요.”
“중학교 때 우리 친했는데?” 중학교라는 말을 듣자 우연의 미심쩍던 눈이 번쩍 뜨였다.
“아니, 워낙 오래됐기도 했고, 내가 요즘 통 기억력이 안 좋아져서...”
“그래?” 실망한 기색이 그의 얼굴에 드러났다. 그럼 차차 알아가기로 하자, 서운한데, 이우연. 내 이름은 앞으로 네가 기억해봐.”
그가 커피잔을 들어 마시며 그녀에게도 권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낯이 익은듯 한 그의 얼굴을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남몰래 뜯어 보았다.
“그런데 그때 병원에서 했던 말은 뭐야?”
“말 그대로야. 네가 알고 있는 줄 알았어. 그런데 네가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며.”
순간 그녀의 눈빛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어느 것도 순순히 알려주지 않겠다는 의지. 그런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그는 선심 쓰듯 이야기했다.
“김현상, 내 이름이야.”
현상과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현상은 흔쾌히 우연이 기억을 찾는 일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주로 일주일에 두어번 만나 외곽의 거리를 걷거나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자신도 비슷한 심리적인 문제를 겪어본 사람으로서 조바심을 내기보다는 천천히 기억해 내도록 그녀를 돕겠다고 했다. 우연도 이런 만남이 싫지는 않아서 재촉할 마음은 없었다.
“난 특별히 취미 같은 건 없는데... 그러는 넌?”
“난 요즘 빈티지 책 모으는 일에 빠져있어. 종이책 말이야. 저번 주 토요일에는 희귀본 구하러 70km떨어진 동산시에 다녀오기도 했지.”
“정말? 그거 모아서 뭐하는데?”
“그냥 모으는 재미. 벌써 50권 정도 돼.”
시시각각 정보도 지도도 변하는 세상 속에서 종이책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장식품에 불과할 뿐이지만, 현상은 그런 비효율적인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오로지 만족감만을 추구하는 진정한 취미가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그들의 회상작업은 한 달이 지나도 큰 진척이 없었다. 우연이 몇 번이나 캐물으려할 때마다 현상은 그녀의 조급함이 불편한듯한 기색이었다.
어느 날 그는 우연에게 말했다.
“네가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지만,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해줄 순 없잖아...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의 기억에 대해서는 나누어 줄게. 내 기억도 완벽하다고 볼 순 없으니까.
어쨌든 넌 나랑 매우 비슷한 부류야.” 그의 단호한 말투에 우연은 왠지 말문이 막혔다.
모처럼 만에 사장이 자신의 개인적인 일정으로 티타임을 갖지 않은 날이었다.
그날따라 우연은 왠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불현듯 생각난 곳으로 향했다. 현상과 자주 들러 어느덧 편안하게 느껴지는 곳, 정돈된 대로를 등지고 그늘진 골목으로 들어섰다. 늘 그와 함께 왔던 골목이라 그런지 자주 왔어도 처음 왔을 때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커피를 한 잔 마시자 향긋한 커피향이 혀 끝을 맴돌고 현상의 부재가 느껴졌다.
현상은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 흔한 홈AI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뭐든 직접 하는 것을 즐겼다. 처음에는 그런 면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그런 방식에 우연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불편함을 자처하는 자세, 어쩌면 그런 면이 그에게 묘한 괴리감과 동시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지도 몰랐다.
창밖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녀의 눈에 건너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빛바래고 일부 철자가 떨어졌지만, 눈에 익은 듯한 상호, 한가, 가 글자가 어색하게 위로 쏠려 있는 것이 및에 자음이 떨어진 것 같았다. 사라진 부분은 명확하지 않지만, O 이거나 ㄱ인 것 같았다. 낡은 가게의 유리문 사이 내부를 우연은 왠지 모르게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러다 현상의 모습을 보았다. 어떤 여자와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거리는 팔이 스칠 정도로 가까웠고 꽤 다정해 보였다. 그들이 카페 건너편 인도를 걸어갈 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멀어지자 우연은 둘의 뒷모습을 건너편 모퉁이로 돌아 사라질 때까지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그들이 사라진 텅빈 거리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현상과 진, 우연과 현상이 동창이라면 둘이 아는 사이라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언제 왔어?”
현상의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어디 갔다와?”
“아니, 오늘 휴일이라 집에서 빈둥대다가 차 한잔 마시려고 나왔어. 네가 와 있는 줄은 몰랐네? 왔으면 연락하지. 하마터면 못 만날 뻔했잖아. 오늘 컨디션은 어때?” 현상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우연에게 말을 건넸다. 아이스 커피가 서빙되자 단숨에 반을 들이켰다. 창밖을 내다보는 현상의 옆모습에 송글하게 맺힌 땀이 곧 다가올 여름을 연상시켰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현상이 말했다. “우리 동해로 여름휴가 갈래? 바다 보고 싶다.”
우연은 매년 휴가를 가지 않았다. 여행은 너무 덥거나 춥고 그도 아니면 예기치 못한 기다림이 생기니까. 새로운 풍경에 감탄하기보다 무얼 볼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는 번거로움과 함께 여행지에서 얻을 즐거움보다는 예상치 않을 불쾌함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현상의 제안에 그녀는 광활하게 압도하는 태양 아래 여름 풍경만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쩌면 진의 말마따나 중요한 것은 빛바랜 과거보다 미래를 나눌 누군가를 찾는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현상의 모습을 보면 이런 복잡한 감정이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여행을 같이 가는 사이가 된다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동해 휴가코스’ ‘연인과 바다여행’ 키워드를 검색하자 추천코스와 예약사이트, 그리고 성향별 맞춤 스케쥴이 끝도 없이 제시되었다.
2박3일 연인 코스를 선택했다. 이국적이고 화려한 인테리어의 호텔, 바다뷰가 환상적인 온수 해수 풀장에서 해수욕,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해안가 절경, 그리고 일몰 시간에 맞춰 바다 위를 횡단하는 모노레일. 그림 같은 풍경들이었다.
“저기...?” 모니터를 속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임대리였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불쑥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다.
반사적인 감정은 비단 그의 독특한 특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임대리가 입사한지 한 달 남짓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공장 구석 창고에서 재고를 찾고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A-108모델이 몇 개 비었다. 분명 전산상 이 구역으로 표기가 되어있는데, 오랜 기간 방치된 창고는 회사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이공간 같았다. 긴 시간을 창고에서 고전하던 그녀는 불 꺼진 작업장을 빼꼼히 내다보았다.
매일 같이 드나드는 곳이지만 어둠이 내리니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꽉꽉 들어찬 재고창고의 적막함 속에 갇혀 공장라인의 기계에서 간간이 들리는 모터 소리를 지속적으로 듣고 있자니 우연은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철컥철컥- 비비빅. 그때 반복적인 기계음 속에 무정형적인 움직임 소리 같은 것이 섞여 들었다. 공장 조립 라인에 마치 누군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즘 시대에 귀신도 아니고... 하지만 생각과 달리 심장이 쪼그라든 그녀는 슬그머니 창고 문을 열고 어둠 속에서 우뚝 솟은 검은 형체를 발견하고 얼어붙었다.
불쑥 나타난 누군가, 하지만 그는 분명 사람이었다. 둔한 몸에 붙은 납작한 정수리, 어둠에 눈이 적응되자 단번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개발팀 새로운 직원인 그가 공장에 직접 내려올 일은 없을 텐데... 더군다나 이 시간에 말이다. 그는 무언가에 몰두해 있었고 말을 붙이러 다가간 그녀는 흠칫 놀라 창고로 되돌아 왔다.
그는 무언가를 정성스레 쓰다듬고 있었는데, 그것은 인류형 로보의 팔이었다. 어깨부터 손목까지의 부분, 귀한 도자기를 감별하듯 조심스레 그것을 어루만지는 그의 모습은 괴기스럽기까지했다. 그녀는 뒷걸음질 쳐 달아나듯 창고로 숨어들어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시간을 끌었다.
“무슨 일이시죠?”
쭈뼛거리며 임대리가 말했다. “저기... 괜찮으시면 같이 점심 먹자구요.”
“어쩌죠. 저 약속 있어요.”
“그럼, 언제 시간 되세요?”
“... ...”
“이번주가 안되면 다음 주라도...” 그는 제법 끈질겼다. 그날 그의 수상한 모습을 보고 달아난 것을 눈치챈 걸까.
“그럼 다음 주에 시간 내 볼게요.” 집요하게 들이대는 그에게 일단 약속을 잡아두고 다른 핑계로 무마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씨오브캐리비안 호텔 가봤어? 거기 엄청나게 좋던데. 바다랑 연결된 해수 풀장이랑 조식이 맛있는 리조트.”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검색해본 몇 곳을 현상에게 이야기했다.
“음... 그냥 무계획으로 가는 건 어때? 가다가 멋진 풍경 앞에서 지겨울 때까지 구경하고, 지나가다 외관이 마음에 드는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는 거야.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또 추억이니까... 여행인데 일처럼 딱 정해놓고 다니는 것도 재미없잖아. 마음 내키는 대로 다녀보는 것. 그게 내가 꿈꾸는 여행이거든. ”
“그것도 괜찮네.”
우연은 현상의 계획이 썩 내키진 않았지만 그의 의견에 수긍했다.
“난 스마트 가이드, AI스케쥴러 그런 건 별로더라고. 누가 내 삶을 자꾸 들여다보고 간섭하는 것 같아.”
임대리와 우연은 근처의 패스트 푸드 가게로 갔다. 그렇게 밥 먹자고 하더니 고작 햄버거라니...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빨리 먹고 불편한 자리를 파할 수 있게 되어 오히려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매장 내부는 매우 북적여 벽을 마주한 바 좌석에 간신히 자리를 잡아 나란히 앉았다.
그는 요즘 유행인 코딩 피규어 증정 세트를 골랐다. 적당한 명령어를 주면,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는 어린애들 용 장난감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그것을 만지작거리더니 앞에 세워두고 혼자 온 사람처럼 햄버거를 한 입 크게 먹었다. 우연과 함께 왔다는 사실을 잊은 듯한 모습에 우연은 조바심이나 그에게 물었다.
“왜 보자고 하신 거죠?”
우연의 목소리에 그가 소스가 묻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그 남자 조심하세요.”
“누구요?” 갑작스러운 말에 그녀는 눈만 끔뻑거렸다.
“김민성, 그 사람이요. 아니면 이름이 뭐라고 하던가요? 이름이 뭐가 됐든 요즘 만나는 그 사람 말이에요. ” 그는 누가 듣기라도 하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를 죽여 말을 늘어놓더니 콜라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미 음료는 다 먹어버리고 얼음만 가득 남은 듯 한 공기 소리 소리가 거슬렸다.
“모르는 사람인데요.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하지만 우연의 머릿속에는 퍼뜩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문림동 카페에 같이 있던 그 남자 말이에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여전히 벽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던지듯 말했다. 역시나 현상과 자주 가는 그들의 카페였다.
“왜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뭐죠? 그 남자 아는 사람인가요?”
“우연씨는 자기자신에 대해 얼마나 확신이 있으세요? 상관없으니까 모른 척할까 생각도 했는데 그래도... 전 얘기했습니다.”
이윽고 임대리는 남은 버거를 마저 입에 욱여넣고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먼저 일어섰다. 그녀는 황당함과 당혹감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얼음이 띄워진 시원한 콜라를 한입 가득 마셨다. 달짝지근하면서 씁쓸한 공기 방울이 입속에서 터졌다.
찜찜한 마음과는 별개로 그녀의 일상은 현상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현상은 그녀에게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다. 어느새 완연한 여름이 느껴질 정도로 후덥지근한 날이 되어 있었다. 퍼미의 날씨예보를 들은 우연은 옷장 깊숙한 곳에서 하얀 린넨 소재의 블라우스를 꺼내 입었다.
꽃향의 포근한 섬유 보존제 향이 남아 있었다. 가벼워진 옷차림만큼이나 들뜬 발걸음으로 향하는 우연의 정수리를 떨어지는 햇살이 뜨겁게 달궜다. 두 사람은 트램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다. 교외로 나가는 것이 삼 년 만이었던가, 혹은 더 되었을까? 터미널은 어딘가를 정처없이 오가는 사람들로 우연의 기억보다 더 복잡하고 정신이 없었다. 우연은 이러한 종류의 혼잡함을 오래간만에 느껴서인지 약간의 기시감을 느꼈다. 어지럼증이 밀려오려던 그때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 멀리서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현상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의 웃음이 그녀에게 와 닿자 그녀는 또렷이 현실로 돌아왔다. 둘은 나란히 교외 행 트램에 몸을 실었다.
“혹시, 임윤성이라고 알아?”우연은 현상에게 넌지시 임대리의 이름을 말하며 얼굴을 살폈다.
“글쎄, 난 모르는 이름인데... 혹시 뭐 생각 난 거라도 있어?”
“아니 그냥 아는 사람인가 해서. 다른 사람이랑 착각했나 봐.” 그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지만 당황한 기색도 거짓말의 기미도 찾지 못했다.
출발하는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창 밖 풍경은 이미 빠르게 그들을 지나치고 있었다. 마치 고화질 체험프로그램의 화면을 재생한 것 같다. 삼십여 분을 달리자 빼곡한 건물이 지나고 창밖은 녹음으로 푸르렀다. 오래전 버려진 도시를 달리자 인적이 드문 광활한 논밭 풍경이 드러 났다. 논에서는 생산용 로봇들이 군데군데 일을 하고 있었고, 옆으로 커다란 흰 새가 논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분명 저 새 이름을 알았었는데...’
“그런데 진짜 어디 가는지 말 안 해줄거야?”
“응, 직접 가서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거의 다 왔어. 아마 깜짝 놀랄 거야. 어제 잠은 잘 잤지?” 생각해보면 그를 만나고 나서 그녀의 증상은 많이 좋아졌다. 아니 좋아진 정도가 아니라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하는 동안 우연은 자신의 불안증이 잃어버린 기억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쳤다.
어쩌면 진이 옳았을지도... ... 한 시간 남짓을 달려 도착한 곳은 그녀가 다녔던 중학교가 있는 동네였다. 그곳은 이전에 그들이 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변해있었다. 주거 구역에 있던 건물들은 모두 헐려 농작물 제작구역으로 변해있었다. 네모반듯한 논과 밭은 처음부터 그런 모습이었던 것처럼 푸르른 모습의 곡물들이 울창하게 자라있었다. 마치 공장을 연상시키는 구획화된 농지였다. “여기가 거기 맞아?”
“응, 많이 변했지?”
그녀는 긴장되기도 설레기도 하는 마음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현상이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했다는 생각때문인지 잊고지낸 곳을 찾은 추억 때문인지 그녀는 마음이 설렜다.
트램을 내리며 그가 뒤따라오는 그녀의 발길을 재촉하듯 슬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둘은 목적지로 도착하는 내내 손을 잡고 걸었다. 땀이 나 축축해진 손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우연은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트램 정거장에서 15분 가량을 걷자 건물이라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너른 부지에 어울리지 않는 회색 조의 웅장한 건물이 나타났다. 고딕양식을 흉내 낸 뾰족한 첨탑과 회색 벽돌로 튼튼하게 지어진 건물은 십자가는 없었지만 오래된 교회처럼 보였고 그러한 종류의 위엄이 있어 보였다.
“교회?”
“아니, 종교적인 그런 곳은 아니고 내가 옛날부터 마음이 불안정할 때마다 오는 곳이야.”
그의 희미한 미소가 왠지 억지로 짓는 것처럼 어색하게 보였다.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우연은 그가 매우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곤 했다. 건물 대문에도 외관에도 아무런 간판이나 표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눈에 띄지 않는 외관과는 달리 현대식으로 꾸며진 내부는 위압감을 줄 정도로 인상 깊은 모습이었다. 마치 겉모습은 보호 색을 띈 속임수였던 것처럼... 거대한 큰 창은 빛을 은은하게 투과했고, 웅장한 느낌을 자아내는 높은 층고를 거대한 공룡이 떠받치듯 커다란 기둥이 지탱하고 있었다. 대리석의 타일 바닥은 은은한 광택을 뿜어내며 전체적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우와, 진짜 크다. 진짜 여긴 뭐하는 곳이야. 이 정도 규모면 관리하기도 힘들겠네.?”
“누군가는 기도를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추억을 만나러 오기도 하지. 지금은 흔해진 망자 시스템의 전신이 된 곳이나 마찬가지야.”
망자시스템이라는 말을 듣자 우연은 왠지 모르게 긴장감이 들었다. 그를 따라 간 방은 긴 복도를 따라 끝방이었다. 그들이 방의 문 앞에서자 10초 후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한쪽 벽이 전면 모니터인 그곳은 방송국의 스튜디오를 연상케 했다. 이윽고 그가 버튼을 누르자 그들 또래의 여성이 화면에 등장했다.
“기억나?” 그는 화면의 그녀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옅게 고개만 저었다.
“선생님, 오늘은 우연이도 같이 왔어요.”
“어머, 정말 우연이니? 우연아, 정말 오랜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화면 속 여자가 그녀에게 정말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우연이 당황한 기색으로 대답하지 못하자 현상이 나섰다.
“예전 기억을 잘못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도와줄게요.” 그가 화면 속의 그녀를 달래는 투로 말했다. 순간 우연은 화면 속의 아빠를 대하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얀 얼굴에 날렵한 턱선, 정갈하게 묶은 머리가 성숙한 느낌의 그녀는 언뜻 보기에도 호감형이었다. 공간의 제약만 없었더라면 우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괜찮은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선생님과의 짧은만남 후 현상은 우연에게 건물 내부를 소개해주었다. 그들이 들어갔던 것과 같은 구조의 작은 방들이 죽 늘어선 복도를 지나면 광장처럼 크고 황량한 공간이 나온다.
천창에서 떨어지는 빛이 광장의 가운데를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추었다. 반대쪽 복도 쪽은 좀 더 큰 공간인 듯한 문들이 몇 개 있고 윗 층으로 가는 계단이 나온다. 그리고 그 계단 뒷편으로 작은 식당이 있었다. 현상은 익숙한 듯 재료들을 찾더니 커피와 토스트를 준비했다.
큰 창으로 아까 지나쳐 온 너른 논이 푸른 바다처럼 펼쳐졌다. 곧이어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갑자기 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좀 놀랐지? 그래도 선생님을 이렇게 직접 만나면 네가 뭔가 기억나지 않을까 하고.”
“조금 당황스럽긴 하네.”
우연은 최대한 덤덤한 척 말했지만 왠지 현상을 보기 껄끄러워 자꾸만 창을 내다봤다. 소나기는 점점 거세져 창문을 때렸고 빗소리는 둘을 외부와의 세상에서 단절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그렇게 된 거야? 아직 젊으신 것 같은데.” 커피를 먼저 한 모금 마신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사고가 있었어. 선생님은 시스템 최초의 수혜자야.”
“그랬구나.” 역시나 본론은 비껴가는 그의 대답, 그는 줄곧 그런 방식으로 말하곤 했다. 과거 의 기억을 찾는 것을 도와준다면서 직접적으로 단서가 될 만한 대답들은 늘 회피하곤 했다.
“그냥 말해주면 안 될까? 네가 날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뭔지. ”
“전에 말했듯이 우린 서로 비슷해. 난 나처럼 네가 기억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의 말투가 전례 없이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의 알 수 없는 말과 행동에 우연은 진절머리가 났다. 유리창에 퍼붓는 빗소리처럼 둘 사이에 많은 잡음이 끼어있었다.
커피는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식어 버렸다. 현상이 철저한 타인처럼 느껴졌다. 기나긴 침묵이 지속된 후 비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한창 퍼부은 비는 대기에 진득한 습기를 남기고 그들이 걸어온 길을 질퍽하게 만들었다. 둘은 트램에 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기... 아니다.”
눈을 감은 현상의 옆 모습을 보며 우연은 꺼내려던 말을 급히 거두었다.
“퍼미,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나는 일을 굳이 다시 생각해낼 필요가 있을까?”
“그 사실이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라면, 알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저 단순한 궁금증이라면 굳이 생각해내기 위해 체력과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일종의 시간 낭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녀는 병원에서 받아온 수면키트를 떠올렸다. 일주일간 잘 때 한 번도 착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수납장을 뒤져 깊이 보관해놓았던 수면키트를 찾았다. 이마에 쓰는 얇은 밴드 같은 그것은 생각보다 가볍고 편했다. 그녀는 그것을 착용하고 잠을 청했다. 정신이 또렷해지는 듯하다 누군가 미지의 세계로 인도하듯 그녀의 정신은 삽시간에 몽환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비빅비빅- 수면키트는 일정한 수면 유도 전파를 내뿜으며 그녀의 침실을 지켰다.
헉. 무언가에 화들짝 놀라 잠을 깼다. 3시였다. 다섯 시간이나 깊은 잠을 잤다. 하지만 또 꿈을 꾼 것 같다. 이번에는 분명 기억이 난다.
그것은 분명 현상이었다. 그리고 모니터 속 그녀 선생님도 함께였다.
셋은 분명 그 강당에 있었고 선생님은 누구보다 친숙하게 느껴졌다. 현상보다도...
커피머신이 향긋한 향을 우연의 방에 흩뿌리기도 전인 이른 아침, 진의 전화가 우연을 깨웠다. “우연아, 대박. 내가 엄청난 걸 발견했어. 네가 저번에 중학교 때 이야기했잖아. 고향 집에 다녀오면서 졸업 앨범 찾아봤거든? 글쎄, 그게 아직도 있더라고. 다음에 만날 때 가져갈게.” 그녀는 진에게 가까운 곳으로 갈 테니 오늘 만나자고 채근했다. 진은 진녹색의 커버가 덮힌 앨범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우연은 그것을 받자마자 서둘러 페이지를 넘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다시 뒤에서 앞으로 샅샅이 뒤졌다. 김현상,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나 이것 좀 빌려가도 돼?”
우연은 집에 와서 앨범을 첫 장부터 천천히 넘겨보았다. 중간 즈음 자신의 얼굴이 있다.
그 얼굴은 이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의 얼굴처럼 느껴졌다. 순진한 미소를 띈 앳된 중학생의 우연은 익숙하지만 어딘가 어색하다. 그러다 그녀를 발견했다. 교외의 그녀. 그녀는 바로 어제 모습처럼 지금과 같았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임윤성’
“퍼미, 사후AI도 거짓말을 할 수 있나?”
“AI서비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규정되어있으나 기본데이터의 오류 및 조작을 통하여 기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곳곳에 우거진 수풀들이 여름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화려한 휴가를 기다리던 그녀의 마음속에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다. 현상에게 묻는다고 얼마나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누구보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정직하게 잘 말해줄 사람이 떠올랐다. 우연은 홀로 트램터미널을 찾았다. 트램에서 내린 후 한참을 인적이 드문 길을 걸었다. 외길을 따라 걷다 보니 함께 걸을 때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다. 분명 외길이었는데, 이 길이 맞나? 헷갈릴 정도였다.
자신을 의심하며 오분여를 더 걷자 평원에 신기루처럼 돋아난 건물, 그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지 않는 건물이 보였다.
우연은 숨을 죽이고 커다란 문을 조심스레 밀고 들어갔다. 무거운 문은 거슬릴만큼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녀의 방문을 누군가에게 알리듯이. 냉방을 한 것 같지 않았지만 내부는 열기 가득한 밖과는 달리 냉기가 흘렀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여가며 그와 함께 갔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리 앞에서 기다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허술해 보이는 경비는 숨겨진 첨단의 기술로 가려진 것이라는 걸.
하릴없이 무언가를 발견하길 바라며 그녀는 이곳저곳을 살폈다. 하지만 사람은커녕 그 흔한 관리 로봇 하나 없었다. 마침내 수많은 방 중 열린 문을 발견했다. 끼이익- 육중한 소리에 걸맞는 무게의 문이 열리자 강당에 줄지어진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곧장 문을 닫고 나갔다. 그러다 방금 본 사람의 뒤통수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어디서 본... 뒤돌아 다시 한번 문을 열자 나는 소리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숙였다.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하듯 어깨를 웅크리고 미동도 없는 남자, 우연은 그보다 두 줄 떨어진 뒷자리에 다가가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납작한 뒤통수에 언뜻 비치는 옆 모습, 저 안경테는 분명 그가 맞았다. 임대리, 임윤성.
그렇게 한참을 무언가에 빠져있던 그가 잠에서 깬 미라처럼 벌떡 일어났다. 뒤를 도는 찰나 둘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는 그저 그녀를 한 번 쓱 보고는 강당을 나섰다. 우연은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아갔다.
“임대리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일직선으로 뻗은 길을 한참을 걸어 나와 너른 광장에 다다라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러는 우연 씨는요?”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요. 모니터실에 있는 그 여자. 그리고 김현상, 아니 김민성도 아닌 그 남자, 그리고 이산중학교. 전 너무 혼란스럽거든요.”
“제가 그때 분명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 사람 믿지 말라고. 조금만 생각해봤더라면 알 수 있었어요. 모든 게 이상하다고... 물론 그러고 싶지 않았겠지만.”
“그럼 대리님도 다 알고 있었나요? 저쪽 사람인 거예요?”
“글쎄요, 저쪽이라는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우연씨는 지금 그 회사에 다니는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세요?.” 임대리는 2층으로 우연을 데리고 갔다. 어두운 복도에 불을 켜니 또 다른 방이 나타났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는 듯 먼지 쌓인 곳. 퀴퀴한 냄새가 베인 곳은 종이 자료가 가득한 옛날의 도서관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한 켠에서 오래된 기사를 찾아 보여주었다. 가지런히 스크랩된 기사들은 겉이 진녹색의 커버로 덮혀 있었다.
-복제기술과 메모리백업시스템의 결합, 정말로 부활이 가능한 시대가 오는가?
-어린 나이에 생을 등진 A양, 가족들의 요청으로 A양의 복제배아 탄생
-수 백의 복제인간을 탄생시킨 MBS 이대표, 새로운 법안 발의에 회귀 사업 난관 봉착
20여년 전의 기사는 메모리백업시스템의 탄생과 발전과정을 보여주었다. 우연은 혼란스러웠다.
“지금 이게 지금 무슨 상관이죠?”
“지금 이 사장, 그 사장이 MBS의 이대표니까요.”
임대리는 다시 입을 닫고 좁다란 계단을 바쁘게 걸어갔다. 그가 걸어가는 걸음마다 발자국소리가 쿵쿵 울렸다.
그날 이후 현상은 우연의 삶에서 사라졌다. 잘려나간 우연의 기억처럼 현상도 한순간에 증발해 버린 것이다. 카페에서도 그가 자주 가던 골목, 거리 그 어느 곳에서도 그와 함께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와의 만남이 진짜였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우연의 시간은 차곡차곡 흘러가 어느덧 함께 떠나기로 한 여행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현상에게 물어볼 것이 산더미 같기도 아예 이대로 그냥 잊혀졌으면 하기도 했다.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중이었다. 출근한 우연의 인트라망에 확인할 정보가 종 모양으로 반짝였다.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누른 그녀는 적잖이 놀랐다.
‘C’
굴곡진 C라는 글자가 그녀의 뇌리를 강타했다. C등급, 입사 후 처음으로 받는 혹평이었다.
간혹 본인이 잘못된 불량품에 매기곤 하는, 폐기처분을 요하는 등급. 우연은 실망이나 분노보다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것이 사장을 향한 것인지 본인을 향한 것인지는 그녀조차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임대리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옥상에서 잠시 보시죠. 지금.’
임대리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의중을 숨기고 사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돌연 불쾌감이 치솟았다. 그는 무채색의 빌딩 숲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임대리님이죠?”
“뭐가요?” 늘상 무미건조한 저 표정
“A등급...”
임대리는 그녀를 빤히 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연 씨 혹시 C등급이예요?”
우연은 순간 자존심이 상했다. 대체 자신은 무얼 확인하고 싶어서 그를 여기까지 불러낸 것인가. 그건 단순히 사장에게 내비치지 못하는 부당함을 임대리에게 화풀이하고 싶은 찌질함이 아닐까? 하지만 그녀의 객기는 이미 벌어진 후였다.
“됐어요.” 뒤돌아 가려는 우연에게 임대리가 말했다.
“정말로 사장이 인류복지 그런 차원에서 우리를 채용한다고 생각해요? 무지와 충동성, 예측할 수 없는 마음이나 행위, 이런 것들이 인간성의 일부죠. 난 우리가 전부 연구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사장이 불만이면 왜 이 회사에 왜 들어왔어요? 이전에 봤어요. 밤늦게 공장에서...” 본의 아니게 격앙된 자신의 목소리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임대리가 우연의 눈을 빤히 본다. 상대방의 눈 너머의 것을 꿰뚫어 보는 눈이다.
“우연씨는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아요? 김우영 박사는 우리 엄마의 메모리 시스템 담당 연구원이었어요. 이 사장은 그때 최초의 백업시스템의 수혜자라고 이름난 선생의 배우자였고 초창기 시스템은 모두 연구관련자 가족들 우선으로 선발되었어요.
난 메모리 백업 시스템을 안 믿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누구보다도 믿고 싶은 사람이었구요. 초창기 백업시스템은 복제연구와 연계되어 진행되었다는 걸 지금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겠죠. 아빠는 거기에는 반대하다가 이사장과 틀어졌어요.” 김우영이라는 이름에 우연은 멈칫했다.엄마...
그는 뜸을 들였다. 그에게도 고뇌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연은 그의 텅 빈 눈빛에서 읽었다. 사장의 “그때 그 곳, 우연씨가 본 곳에 우리 어머니도 있어요. 초기 망자 구현 시스템 적용자였죠. 그땐 아직 어려서 그렇게라도 엄마를 보는 게 좋았어요. 그저 기억을 영상화해 구현한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정작 엄마를 그렇게 만든 아빠는 돌아가실 때 절대로 자신은 백업하지말라더군요. 참 웃기죠? 점차 업데이트를 통해 별도의 인격체처럼 변하는 모습을 보니 의구심이 들더군요. 여기에 정말로 우리 엄마의 1프로라도 들어있는게 맞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단 영점 몇 프로라도... 이십 년 간 얼마나 그 생각에 빠졌는지 몰라요. 그런데 프로그램을 알면 알수록 반감이 들었어요. 다만 메모리만으로 그 사람을 구현한다는게 가능한건지. 우린 그냥 자기만족의 허상 속에 살고 있는건 아닐까? 우연씨가 만난 그 남자, 그 남자 비유하자면 그는 AS기사 같은거예요.”
“그럴 리가요. 내가 로봇도 아니고...”
그녀는 현상을 처음 만난 날을 기억했다.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남자, 그리고 마치 짠 듯이 맞아 떨어진 다음 번의 만남도... ...
우연은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포근함이 그녀를 감쌌다.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자 스크린 관처럼 현상과의 기억이 비췄다. 뇌과학연구, 복제기술, 로봇사업... 이 사장의 화려한 경력만큼이나 복잡한 그의 성정, 그리고 엄마가 행했다는 연구, 복구된 아빠.
하지만 뭔가 비어있다. 아빠는 12년 전에 죽었고, 엄마는 18년 전 일을 그만두었다. 아빠는 그 전에 어떤 모습이었던가? 어릴 적 기억은 뚜렷하지만 이상하게 아빠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연구복 가운을 입은 젊은 엄마의 모습, 자그마한 자신의 손을 하염없이 내려다 보던 기억, 그 속에는 아빠의 얼굴이 없다.
“퍼미, 나 내일은 출근 없는데 뭘 하면 좋을까?” 우연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계획대로라면 파도가 부서지는 동해안의 어딘가에 있었을 그녀였지만... 현상이 사라진 그녀의 일상은 무료했고 그만큼 정돈됐다.
“요즈음 30대 직장인 미혼여성 여가의 추세는 마음 힐링 프로그램입니다.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한 뇌파 활성화 프로그램입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날씨가 좋으니 산책을 하는 것도 추천합니다. 장소를 추천할까요?”
퍼미와 대화하는 시간이 늘었다. AI가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은 늘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구석에 박아둔 숙제처럼 풀리지 않는 물음이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왜? 그동안 그가 그녀에게 보여주었던 호의들은 다 꾸며진 것이었을까?
우연은 퍼미에게 택시를 호출했다. 혹시나 근처에서 현상을 마주 칠까 그녀는 속도를 저속으로 조절하고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대부분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아직 들어야 할 말은 있었다. 진료실 앞 대기실에는 여전히 자신만의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 분주했지만 역시나 현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진료예약명단에 없이 찾아온 우연을 보고 간호사가 당황했다. 진료실 문을 두어 번 들락거리던 간호사는 곧 우연을 진료실 안으로 안내했다.
“아주 좋아졌네요. 꾸준한 명상과 인공지능을 활용한 규칙적인 생활이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네요. 이제 정기적인 화상 진료로 대체해도 될 것 같네요. 혹시 모르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수면키트는 착용해서 수면의 질을 체크하시구요. 새로운 취미를 갖는다거나 짧은 휴가 같은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선생님, 김현상 아시죠?”
우연의 말에 화면에서 눈을 떼고 안경을 벗어 눈을 비빈 후 우연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의사는 서랍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명함에는 낯익은 글자가 보였다.
<MBP>당신의 기억이 곧 당신입니다.
이제 두 번 다시 이곳에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처음 그곳에 오던 날의 혼란을 떠올렸다. 여전히 둥글고 안락한 형태의 의자들,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증강 현실로 본 동해바다는 어린 시절 방문했던 기억보다도 아름다웠다. 파란 바다는 수평선과 맞닿아 있었고, 깨끗한 모래사장은 막 태어난 모래알들만 골라놓은 듯 반짝거렸다. 그 곳에서 그녀는 쾌적한 산들바람과, 따뜻한 햇볕의 온도, 시원한 촉감만을 느낄 수 있었다. 땡볕과 찝찝한 끈적임, 정신이 아찔할 정도의 어지러움 따위는 없다. 일광욕이 지겨워진 그녀는 잠시 프로그램을 멈추었다.
“퍼미, 나 회사 관둘까? 여행이라도 진짜 한 번 가볼까?”
“여행은 견문을 넓히고 새로운 사고를 하는데 유용한 여가 활동입니다. 추천하는 장소는 해외로는 미국, 일본, 싱가포르가 있으며, 국내여행으로는 제주, 강원도 강릉, 거제도가 있습니다. 여행일정을 고르고 항공을 예약하시겠습니까?”
아침부터 회사는 임대리의 퇴사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근무자들은 그가 산업스파이였다느니, 사장에게 밉보여 결국에는 잘린 거라느니 그들끼리 모여 쑥덕거렸고 휴머노이드들은 묵묵히 그들의 자리를 지켰다. 우연의 메일함이 깜빡거렸다.
-드디어 엄마를 해방시켰습니다- 이메일에는 논 밭의 회색 건물을 연상시키는 무너져내린 오래된 유적지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황폐해진 것. 아주 오래전 제 기능을 잃어버리고 고작 상상만을 남겨둔 형편없는 조각들. 그리고 암호가 걸려진 첨부파일도 하나 있었다.
왠 암호... 그녀는 무시하려다가도 괜히 궁금해졌다.
그가 그녀에게 보낼만한 메시지. 둘이 함께 건물에서 만난 날, 그녀의 생일, 그의 사번, 뭐지? 그녀는 혹시나 싶어 C를 눌렀다.
아니 이 사람이... 정말, 파일이 열렸다.
최초의 기억력 재생시스템의 수혜자는 모 중학교 교사 김씨이다. 그의 배우자인 이재한 뇌 연구자는 갑작스러운 뇌사상태에 빠진 그녀의 기억을 복원한 AI시스템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앞으로 소중한 이를 잃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위로할 신기술로 급부상해 많은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J 3세, L15세, K 18세... ...지난 7년 간 23명의 복제인간들은 MBP의 기억을 주입받아 두 번째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국회의 2077년 복제윤리법안의 통과로 이후 더 이상의 수혜자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적인 비용에도 불구하고 10만의 가입자를 유치했던 회귀프로그램이 상용화를 앞두고 무용지물이 될 예정이다... ...
이 연구소장과 같은 팀의 김 연구원이 개발한 복제연구는 15세에 사망한 자신의 딸을 위해 그녀가 시도한 연구로...
윤리적으로 위배된다는 법안에 부딪혀 회귀프로그램은 사실상 실현불가능한 기술이 되었다. 메모리백업시스템만 남은 절름발이 기술이 된 MBS연구소의 존립여부가 관건이 될 예정이다...
딩동댕동 요란스러운 초인종 소리가 적막한 복도를 울린다. 엄마는 문을 열어주며 우연의 안색을 살핀다.
“나 이제 병원 안 가도 된대.” 우연이 신발을 벗으며 말한다.
“그래, 다행이다. 잘 자고 잘 먹고 마음편히 살아야지. 미래는 마음 먹은 대로는 안되더라. 너무 옥죌 필요 없어.”
모니터는 꺼져 있었지만 테이블에는 여전히 커피 두 잔이 놓여있었다.
“너도 뭐 좀 마실래?”
“응, 시원한 커피 한 잔만. ”
엄마가 부엌으로 향한 사이 우연은 엄마가 앉아 있던 자리에 급히 던져진 리모컨을 들어 모니터를 켰다. 언제나 같은 아빠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빠, 나왔어”
“어, 우리 딸 잘 지내지?” 그의 얼굴이 환하게 웃는다. 눈가의 깊은 주름 두 개가 물결처럼 일렁인다.
“아빠, 난 누구야?”
우연이 아빠의 두 눈을 마주하고 질문하는 순간 아빠는 우연의 기억 속 남겨진 표정처럼 측은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 본다.
“내 딸이지.”
그때 엄마가 커피를 가지고 돌아와 황급히 모니터를 껐다. 거실 한 가운데 탐스러운 제라늄꽃이 생명력을 뽐내며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