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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고선영 Feb 18. 2020

사물이 건네는 말.

노트북 그리고.


일을 미뤄두는 것도 질리고, 갖고 다니고 열었다가 그냥 닫고 오는 일이 허다했다.

며칠을 꼴도 보기 싫어서 두었는데 막상 쓰려고 꺼냈더니 웬걸.


전원 선이 없는 것이다.

한참을 찾다보니 결국 내가 자주 가는 커피숍에 두고 왔다는 걸

더듬고 또 더듬어 역추적 한 끝에 알게 되었다.

나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도무지 정신이 없어진 사람 같다. 왜일까.

왜긴 왜냐. 그냥 언제나 마음이 앞서니 그렇지.

다행히 내 노트북 전원 선을 커피숍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휴우~



어디 조금이라도 남은 배터리가 있겠거니 했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또 눌렀는데 아무런 기별이 없다. 완전 방전되었다는 소리다. 갑자기 빠르게 처리할 일이 있는데 멘붕이 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

멈춰버린 것 같은 이 시간.



노트북이란 것은 그 나름의 기능을 하고 있지만 충전이 되지 않거나 전기 공급이 되지 않으면 결국은 무용지물이다. 이럴 때는 구석기인들의 뗀석기보다 못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뗀석기는 당장 지나가는 노루가 있으면 던져서 잡거나 풀을 뜯을 수도 있잖은가. 노트북을 던져서 노루를 맞추느니 그냥 맨손을 이용하겠다. 현대인이라면 하나쯤 가지고 있는 노트북. 과학기술의 집합체인 노트북이 아무런 쓸모를 얻지 못하는 이 시점에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노트북에 시킬 일을 한아름 가지고 있으면서 지금 이렇게 타박할 때가 아니다 싶어 정신을 버쩍 차린다.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 이 지점에 멈춰 선다.

나는 지금 전원이 공급되고 있는걸까? 어떤 때는 엄청나게 파워풀하게 움직이고, 기분이 업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순간엔 또 가게 앞 두 팔을 펄럭이다가 바람이 훅~ 꺼져서 무너져내린 공기인형같다.

숨을 한 번 몰아쉰다. 숨이 쉬어지는 것이다, 코를 어루만진다. 콧잔등과 콧망울, 코 위에 있는 까끌까끌한 느낌까지. 나는 느끼고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전원이 공급되고 있는 것.



그러다 문득 이 생각이 든다.

내가 노트북이라면... 나는 어떤 선에 연결되어 있을까?

제 아무리 똑똑한 척 해도 이거 없으면 꽝인 건 뭘까? 오늘은 이 생각이 나를 물고 늘어진다. 그냥 잘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입모아 이야기하는 건 ‘사랑’ 같다. 그 사랑을 좀 세분화하면 부모의 사랑, 자녀의 사랑, 아내나 남편의 사랑, 연인의 사랑, 동료의 사랑 등... 거기서 더 들어가면 ‘사랑’이라는 단어는 형태가 바뀌기도 한다. ‘인정’, ‘존중’, ‘배려’ 또 뭐가 있을까? 이럴 때 보면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제한적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전원은 사랑같다. 질투, 이기심, 오기 온갖 이름으로 변형될지는 모르지만 결론은 사랑이다.



나는 그 사랑이란 것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자존감’이라고 부르는 ‘자기사랑’ 같다.

자존감의 사전적 정의를 찾기 전에 내가 정의를 내려보면 이렇다. 


자존감은 ‘스스로의 존재를 감사’하는 것.


이것이다. 가만히 쌔근쌔근 잠든 나를 떠올려본다. 곤히 잠든 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을 손의 온기로 쓸어내린다.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았던 나에게 대견한 마음이 든다. 뭘 그리도 애쓰나 싶어서 안쓰러운 마음도 든다. 그렇지만 그런 내가 사랑스럽다. 주름도 늘었고 피부에도 이것 저것 났지만 그런 것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그건 삶의 흔적이니까. 괜찮다.


잠깐 나를 떠올렸는데 눈가가 촉촉해진다.

감사한 마음이 퍼진다.        



노트북의 전원 선을 잃어버린 것은 어쩌면 오늘 내가 이 글을 쓰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때때로 우린 노트북이 되기도 하고, 노트북의 전원 버튼이 되기도 하고

또 타이핑을 하는 자판이 되기도 한다. 

또 어느 땐 전원선이 되겠지.

     



서로가 서로에게 노트북과 전원 선 같은 존재가 되기를.



2020. 0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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