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봄
#16 엄마를 위한 글쓰기 30일
#작가고선영 #엄마를위한글쓰기30일 #16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의 자격지심은 쩐다. 그걸 남들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그런 감정이 나를 사로잡을 때 나는 강한 수치심을 느낀다. 그렇게 찌질한 인간이 아니고 싶다. 뭔가 좀 근사한 인간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한 번도 근사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게 솔직한 마음이다. 근사함에 최대한 다다르려고 노력하다가도 그 노력에 허덕이는 나를 본다.
방금 책방에 왔다. 더 빨리 와야 하는데 그냥 오랜만에 쇼핑을 했다. 곧 봄인데 폴라티셔츠 하나, 얇은 봄 점퍼 하나 그리고 리유저블 텀블러 하나. 괜찮은 소비였는지 따지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냥 기분 전환이 필요할 뿐. 오랜 시간 소비를 억누르고 살았다. 물론 그렇다고 소비를 안 한 건 아니다. 때때로 비싼 물건들을 샀다. 그러나 그건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어떤 물건을 사면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일까 문득 생각한다. 봄이라서 모두 연두 연두 하다. 내가 고른 것들은 모두 연둣빛이다. 그 연둣빛이 좋다. 만물아 소생하라~
감정에 대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나의 감정을 마주한다. 그것이 나에게 큰 즐거움을 줄 때도 있지만 당혹스럽고, 화끈거리는 경험을 줄 때도 많다.
오늘은 나에게 ‘응원’이 많이 필요한 날인 것 같다. 그래서 지금부터 끊임없는 상상의 세계로 가보려고 한다. ‘감정디자인 스튜디오’를 개관하는 날이다. 처음에 동물책방 12개를 계획하고 6.5평의 작은 공간인 악어책방을 시작할 때만 해도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나의 일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딱 하나의 단서를 말하자면 ‘사람’이다. 사람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 같다. 혼자 일할 때 좋은 면도 있지만 외롭고 답답한 면도 많았는데 이제 함께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50명이 되었다. 그들과 나는 자주 대화한다. 우리가 현재 집중해야 할 프로젝트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듣는 일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내가 만든 상품들은 초기에 주목을 잘 못 받다가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책도 8권을 썼다. 그림책 3권, 에세이 3권, 감정 디자인 책 2권. 점점 내 일이 재밌어지고 있다. 쉬운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계획 중인 프로젝트는 훨씬 더 방대한 프로젝트다. 예전에는 그것을 잘 몰랐는데 내가 지지부진하다고 스스로 낙담해 있을 때에도 나는 내 미래를 위해 계속 한 발짝씩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사업을 키울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다. 그런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많은 데이터가 쌓였고 그것을 통해 지금의 내가 있다.
감정디자인 스튜디오에 대한 그림은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했었다. 그 공간의 철학적인 의미에 대해 오랜 시간 생각했다.
다시 현실이다. 최근에 생각한 건 ‘건강’이다. 내가 건강과 몸의 컨디션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더 또렷하게 느낀다. 그래서 내 몸 관리가 필요하다. 내가 쉽게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런 건강 관리법은 무엇일까? 어젯밤에 서울식물원에 갔다. 혼자서 호수를 따라 2바퀴 반을 돌았다. 혼자 걷다 보니 마음도 몸도 조금 가벼워졌다. 집에 돌아와서 쏟아지는 식욕과 싸웠다. 분명 산책 전에 ‘콩나물 국밥’을 한 그릇 먹었는데 계속 배고픈 기분이다. 가짜 식욕에 속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엄마가 생각난다. 오늘 아침에 엄마는 큰 언니네 집에 간다고 나와 비슷한 시간에 길을 나섰다. 엄마를 보니까 언니네 길로 가는 것 같지 않았다. 엄마는 거짓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공사를 하고 있는 굴삭기를 보니 더럭 겁이 나서 한참을 돌아서 간 것일까? 왜 이렇게 의심할까? ‘엄마’를 보면 자꾸 판단하고 평가한다. 그게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엄마가 나를 판단하고 평가한다고 느껴져서인 것 같다. 어젯밤에 엄마의 머리맡에 ‘마더북’을 놓았다. 엄마는 그 책을 오늘 아침에 봤다. 엄마는 이제 그 책을 틈틈이 써 내려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그 책에 적힌 엄마의 글을 볼 것이다. ‘나’라는 렌즈로 본 엄마 말고, ‘엄마’라는 렌즈로 본 엄마가 궁금하다.
오늘은 16일째다. 엄마를 위한 글쓰기가 끝났으면 좋겠다. 좀 다른 주제로 글쓰기를 하고 싶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나에게 정한 약속이다. 그래서 내가 이 약속을 잘 지켜주기를 바라고 있다. 당분간은 해야 한다. 14일 남았다. 14일만 참으면 된다. 엄마에 대한 나의 생각이나 감정이 너무 고정되어 있고 그 불편한 느낌을 마주하는 것이 싫다. 그래도 기대하고 있다. 이 일은 그냥 내가 캐러멜과 사탕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이 아니다.
쇼핑으로 산 옷을 입은 나를 본다. 봄 같다. 기분이 좋다. 오늘 하루도 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