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숲이지영 Dec 29. 2023

진상손님 대처법

2023년 겨울 이야기.

 

  폴폴 내리는 눈이 반갑다. 토막토막 잘려있는 나무둥치 의자 위로 흰쌀밥 봉긋하게 얹은 듯  소복하게 쌓인다. 이렇게 차분하게 내리는 눈은 오랜만이다. 제주에서는 우박처럼 얼굴을 때리는 싸락눈은 쉽게 만날 수 있다. 거센 바람과 함께 옆에서 위에서 앞에서 휘몰아치는 그런 풍경만 마주하다 사뿐히 내려앉는 눈을 보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발목이 푹푹 잠길 만큼 쌓이자 도로도 한산하고 숲도 고요하다. 비행기 결항으로 예약되어 있던 팀들의 절반은 취소가 되었다. 손님이 줄어든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빈 타임이 주는 여유에 조금은 들뜨고 신이 났다. 눈 사진을 찍기 위해 강아지처럼 폴짝대며 숲 곳곳을 걸었다. 이렇게 거센 날씨인데 엄마와 시아버지는 교육을 나가신다. 길이 얼었을 것 같다며 사륜구동인 트럭을 몰고 움직이신다. 5일간 진행되는 관광안내사 현장실무교육을 신청하셔서 참석한단다. 칠순의 나이에도 배움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참 멋진 모습이다. 

  교육을 다녀와서는 관광안내 시 컴플레인 사례별 응대방안의 수업을 전해주셨다. 교육생들이 모둠별로 역할극을 했던 모양이다. 진상고객이 되어서 말도 안 되는 컴플레인을 걸고, 그럴 때 어떻게 대하는지 상황별로 시연을 했단다. 궁궐해설을 하는데 인터넷으로 찾아보며 연도나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계속해서 따지는 손님이라던지, 해설을 하는데 계속해서 칭얼대고 끼어드는 어린아이의 투정 등등 그 요소 하나하나가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이게 수업이고 시연이니 깔깔댈 수 있지, 실제의 현장에서 충분히 마주하는 상황들이다. 예약을 뒤늦게 해서 안된다고 할 때에도 자기의 사회적 지위나 위치를 거들먹거리며 왜 안되냐고 따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이가 위험한 행동을 하고 꽃들을 마구 꺾고 있어도 귀엽다며 사진만 연신 찍어대는 부모가 있기도 하다. 그 정도면 양반이다. 밝은 대낮인데도 일행의 반이 취한 채로 비틀거리며 숲길을 걸으며 '아가씨~, 해설 말고 노래 한 곡 해봐.' 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언행을 하는 동창회 팀들도 있다. 세상에는 정말 멋지고 정중한 사람이 많은 만큼, '설마 그렇겠어?' 할 만큼의 행동을 하는 이들도 많더라. 이야기를 들어보니 숲이라는 공간이라 덜한 거지 다른 음식점이나 공항 같은 곳에서는 더더욱 별일이 다 있단다. 그리고 그러한 진상손님은 방문하는 손님만의 문제도 아니다. 여행을 계획하고 인솔하는 여행사나 가이드들이 오히려 더 진상손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며칠 전 남편이 저녁식사 시간에 너무 무례했던 누군가의 예약 전화 내용을 전해줬다. 높은 사람들 온다며 방문할 테니 이지영 해설사님으로 배정해 달라고 하자 순서가 정해져 있어서 다른 해설사님이 될 수도 있다고 답변을 드리니 왜 안 되냐고 따지며 그 숲에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거들먹거리는 여행사 대표인지 관계자분인지 때문에 화가 났단다. 이미 그날은 한 달 전부터 정중하게 예약을 부탁한 팀도 있는 날이었다. 그렇게 높은 사람들이 여러 명 오는데 분명 여행사라면 이틀 전에 비행기표를 끊고 여행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을 텐데, 일정표는 오래전에 나와서는 그 날짜 가까이 돼서야 통보하며 알아서 모셔라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다르고 '어' 다른데 여행사 입장에서는 사회적 지휘가 높은 사람이 중요한 손님이라지만 우리에게는 예전부터 너무너무 듣고 싶어서 한 달 전부터 해설사님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묻고 그때에 시간을 맞춰서 여행을 계획한 단 한 사람이 더 소중한 것이다. 그때 그 여행사 분이 방문했을 때, 이 숲은 예약할 때마다 불친절하다며 컴플레인을 걸고 갔단다. 그런데 그 전날 다른 여행사 가이드 분이 "난 여기만 오면 기분이 좋더라. 어떻게 다들 매표보고 전화받는 이들까지 하나같이 친절하냐"라는 칭찬을 들었던 터였다. 숲의 직원이 불친절했다면 분명 그분이 예약할 때마다 불친절한 말을 했을 것이다. 

  시아버님께서 진상 손님을 대할 때 이야기를 전해주며 들려준 불안돈목(佛眼豚目) 이야기가 생각났다. 조선금석총람에 실린 말로,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당신은 돼지를 닮았다며 농을 쳤다. 그런데 무학대사는 이성계에게 당신은 부처를 닮았다고 받아쳤다. 이성계는 허물없이 지내자며 농담을 한 것인데 자신의 의도를 거절한 셈이라 불평했다고 한다. 그때 무학대사가 '부처님 눈으로 보면 부처가 보이고, 돼지의 눈으로 보면 돼지가 보입니다.'라고 대답했단다. 참 유쾌하게 풀어내지 않았는가.  

  말로도 사람은 쉽게 다칠 수 있다. 칼로 찌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하루의 기분을 좌지우지할 수 있고, 이러한 일들이 쌓여 마음의 병으로 키워갈 수도 있다. 눈이 펑펑 왔는데 분명 손끝이 시린 온도인데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는다. 부드러운 눈 덕분에 포근하게 느껴지는 날이다. 똑같은 물이 비수 같은 뾰족한 얼음이 될 수도 있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따뜻한 함박눈이 될 수도 있다. 진상손님을 덜 만나는 2024년이 되길 바라본다. 그만큼 내가 진상 부리지 않는 2024년이 되어야지. 



- 숲에서 만난 생명 이야기 : 분홍색 꽃처럼 터트린 열매 참빗살나무.


 손님들이 숲 나오는 길목에 이렇게 추운데 분홍색으로 핀 꽃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떠오르는 꽃이 없다. 지금 시기에 분홍색 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싶어 가보니 정말 꽃같이 어여쁘다. 꽃이 아니라 참빗살나무의 열매였다. 분명 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에는 사람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았는데 정작 꽃이 진 계절에 아름답다고 난리이다. 잎맥이 빗살 같아서라고도 하지만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머리를 빗을 때 쓰는 촘촘한 참빗을 만드는데 쓰이는 나무로 기억한다. 초록색 열매였다가 가을에 분홍색으로 변하다가 완전히 익으면 껍질이 4조각으로 갈라진다. 그래서 꼭 꽃봉오리 같은 모양새가 된다. 지금 색깔이 화려하게 떨어져 있는 노박덩굴의 열매도 그렇다. 새들의 눈에 띄어 씨앗을 멀리 보내기 위한 식물들의 생존 본능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은 익어가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했던가. 벌써 한 해의 끝자락이다. 하는 일 없이 또 한 해가 흘러가버린 것 같고,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또 다른 새해를 맞이하는 것만 같다. 

  어제 6살 둘째가 아침에 일어나서 다리 찢기를 하다가 생각처럼 몸이 유연하게 안 움직이는 "엄마, 나 나이가 들어서 이것밖에 못하겠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웃음이 빵 터졌다. 내가 엄마에게 나이 들어가는 것 같다고 하면 까불고 있다고 대답해 줬던 게 생각난다. 이제는 우리 엄마도 나에게 "너도 이젠 나이 들고 있으니 건강관리 잘해."라고 말한다. 20대의 청춘은 그 자체만으로도 싱그럽고 아름답다. 하지만 꽃이 졌다고 그 아름다움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참빗살나무가 나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솔직히 나는 나이 들어감이 아직은 슬프지 않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생각들을 할 줄 아는 지금이 더 좋다. 한 살 한 살 그렇게 또 시간이 채워지면 분홍 꽃처럼 보이는 아름다움을 또다시 터트리기도 할 테지.





  

매거진의 이전글 의외의 관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