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내 첫 번째 성우 시험은 MBC 성우 공채였다.
아마도 2004년 봄이었을 것이다.
서울 입성 기념으로 찍은 셀카 사진 속 상의가 화사한 형광 연둣빛이었으니까.
서울이 그렇게도 궁금했다.
그리고 성우 시험이 더더욱 궁금했다.
그래서 엄마를 졸라서 KTX를 타고 함께 서울 구경 겸 MBC 공채 시험을 치르러 왔다.
배운 것도 없고, 준비한 것도 없으니 소풍 가는 마음이었다.
MBC 구사옥 정원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열심히 대본을 보고 연습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엄마와 셀카를 찍으며 희희낙락.
혹시나 그때 나를 본 사람들은 ‘저 애가 제정신인가’ 했을 거 같다.
너무 여유로웠으니까.
번호가 임박해 오자 큰 공개홀로 이동해서 내 순서를 기다렸다.
정말 하나도 안 떨렸다.
뭐 아는 게 있어야 떨리지 않겠는가.
지금부터는 기억이 흐릿한데...
녹음 부스도 아니고 천막 같은 걸로 가림막을 해 놓은 공간에서 내 생목소리를 들려줘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합격한 MBC선배님들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옆 부스의 울며 연기하는 소리, 웃으며 연기하는 소리 다 들리는데, 도대체 어떻게 집중할 수 있단 말인가?
결과는?
말 그대로 광탈이었다.
입 떼자마자 나가라고 하더라.
사투리 쓰는 어린애의 연기를 듣고 있어 줄 여유가 심사위원들에게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현장의 그 열기와 설렘을 경험하고 나니, 이상하게 도전하고 싶어졌다.
물론 도전을 시작하기 전까지 또 나름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다.
KBS아카데미를 다니면서 가장 처음 치른 시험이 KBS 공채 시험이었다.
그래서 부분적이지만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대기할 때부터의 심장 두근거림, 처음 오디션 대본을 받아 들었을 때 그 막막함도 생생하다.
그때는 나도 2004년 봄의 웅성거림 속에 있었다.
5개 유형의 연기와 내레이션 문장들이 섞여 있었는데, 연기 문항은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떡하지? 뭘 하면 좋지?”
어리바리하다가 시간만 잡아먹고 시험 부스에 들어갔다.
그래서 또박또박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내레이션을 골랐는데...
입을 떼자마자 심사위원들은 눈치챈 거 같았다.
‘아, 이 사람은 아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작부터 몸이 졸아서 숨소리도 약했다.
채 한 줄을 읽기도 전에 단어를 씹었던 거 같다.
나는 땀을 잘 안 흘리는 체질인데 정수리에서부터 땀이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번째 줄을 시작하기도 전에 심사위원의 배려로 나는 대본을 빼앗겨 버렸다.
첫 시험은 그렇게 넋이 나간 채 끝나버렸다. 순식간이었다.
1년 동안 준비했는데 10초 만에 끝났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기운이 쪽 빠졌다.
‘그래 이제 처음인데!’
라고 생각하기에는...
처음 공부하고도 합격해 버린 KBS 아카데미 동기가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 후로
대교방송 1번, 대원방송 1번, 투니버스 1번, EBS 1번, 또 KBS 3번 더 치르고 합격했다.
가볍게 봤던 MBC까지 합치면 9번의 시험을 치른 셈이다.
성우가 되기 위해 5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떨어졌다.
그래도 쉽게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소풍 가는 기분으로 시작했기에, 그 길이 이렇게 험난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 좌절할 때면 말해주곤 한다.
“괜찮아요, 저도 아홉 번 만에 됐어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