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계획도 루틴도 없지만

by 성우 김태리

외삼촌댁에서 신세를 질 무렵에도 낭독봉사를 하려고 점자도서관을 찾아 헤맸다.

운 좋게도 가까운 곳에서 도서관을 찾았지만, 나의 미숙한 실력으로는 담당자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서울에는 실력 좋은 낭독봉사자들도 얼마나 많은지,

도서관에 들를 때마다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이 무거웠다.


다시 서울에 올라온 뒤에는 점자도서관은 꿈도 꾸지 않았다.

내게는 너무 큰 장벽처럼 느껴져서, 시도조차 포기해 버렸다.

그러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럼 나는 뭘 해야 하지?’


‘루틴’이라는 개념조차 몰랐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수업시간에 ‘연기’를 할 때 “좋다”라는 한 마디를 받기 위해 뭘 해야 할까만 집중했다.

... 가난한 지망생에게 있는 건 ‘의지’뿐이었다.

당시의 내 체력은 형편없었다.

말라서 근육이라곤 없어 흐느적거리고 다녔다.

그 몸으로 근무가 끝나면 보라매 공원(근처에 살았다) 운동장을 30분씩 돌았다.

달리다 걷다 하는 어정쩡한 러닝이었지만 그저 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복식호흡에 좋다는 복근 운동도 간단히 해줬다.

지금도 기억난다. 보일 듯하다... 지금은 영영 사라진 복근.

그래도 그 시절에 튼튼해진 다리 덕분에 치마는 안녕이지만, 그때 길러진 허벅지 힘덕에 지금까지 버티는 것 같으니 후회는 없다.


귀와 입도 쉬게 두지 않았다.

드라마 스트리밍 서비스도 열심히 틀어두었다.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배경음처럼 틀어놓는데, 집중해서 보기보다는 반복해 흘려들으며 좋아하는 배우의 화술을 익혔었다.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였다.

청소하면서, 설거지하면서, 샤워하면서 듣고 또 들었다.

그럼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대사가 입에 달라붙었고,

완벽하진 않아도 비슷한 화술로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 좋았다.

애니메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성우와 비슷한 느낌의 목소리가 나오는 날에는 내 목소리에도 색이 입혀진 거 같아 자신감이 붙었다.


그 시간이 좋았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이상하게 질리지 않았다.


문화생활은 오롯이 ‘공짜 운’에 기대었다.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엔터 업계의 인심은 지금보다 후했던 거 같다.

무료로 배포하는 잡지에도 엽서를 써서 보내면 연극 초대권과 영화 시사회 티켓이 딸려왔다.

시사회만 추첨하는 어플이나 온라인 카페에 들어가면 늘 관객을 모집했다.

엽서를 부치고, 댓글을 달면 내 돈 안 들이고 다양한 장르의 연기들을 볼 수 있었다.

개봉 영화와 소극장 뮤지컬에, 연극까지.

공짜 운에 기댔는데, 정말 운이 좋았다.


그 시절의 나는 혼자서 꽤 바쁘게 돌아다녔다.

돌이켜보면 멋진 루틴도, 거창한 계획도 없었다.

하루하루를 채우는 목표는 “연기 좋다”라는 한마디였다.

선생님의 짧은 칭찬 한 마디가 몸을 일으켰고, 재미라는 감각이 나를 밀어줬다.


그래도 ‘봤다’, ‘해봤다’, ‘들어봤다’라는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듯하다.

나의 첫 번째 ‘경험 루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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