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에 있었던 KBS성우 시험은 내 마음속 ‘마지막 시험’이었다.
서른을 앞둔 29살.
이제는 진짜 ‘내 몫의 밥벌이’를 고민해야 할 시기였으니까.
이룰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성우라는 꿈.
내게 그 길은 내 삶에 대한 책임감만큼 큰 불안을 안겼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점이, 오히려 나를 더 단단히 붙잡았던 거 같기도 하다.
그래서 연습방법을 점검하고, 바꿨다.
일단은 “대본 자료”!
지금이야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내가 지망생일 때를 떠올려보면
선생님들이 대본 준비를 더 많이 했던 거 같다.
다양한 연기를 해 볼 대본이 필요했다.
애니메이션과 영화는 주변소음처럼 틀어놓고, 드라마 대본은 KBS를 이용했다.
KBS 라디오는 대본을 다운로드할 수는 없지만, 대본을 무료로 볼 수는 있었다.
그리고 KBS 공채시험은 그 해의 드라마 대본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KBS무대’나 ‘라디오 독서실(지금은 '라디오 문학관'이다)’, ‘라디오 극장’ 등의 프로그램 대본들을 모조리 훑어보았다.
전부를 소화할 시간은 없었기에 ‘무대’와 ‘문학관’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감정선이 보이는 인상적인 장면들을 발췌하기 시작했다.
대본들은 이렇게 분류했다.
1, 연령대 :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노년까지 총 6세대를 촘촘히 세분화
2. 분위기 : 차분한 톤의 주연 vs 극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조연
3. 조합 : 각 연령대별로 주연과 조연으로 나누기
이렇게 하나하나 정리를 해 나가면서 리딩을 해보니 역할들의 의도가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연기해야 할 목적과 표현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아줌마’나 ‘코믹한 조연’ 캐릭터가 약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그 캐릭터들의 연습 비중을 늘렸다.
연습에서도 주의사항을 만들었다.
1. 전문을 먼저 다 읽어 본다.
발췌한 장면의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려면, 작품 전체를 읽고 분위기를 이해하는 게 필수였다.
그렇게 해야 이 인물이 왜 이 말을 하는지 빨리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대본이 원하는 호흡과 뉘앙스에 익숙해졌다.
대본을 보면 “아! 이건 이렇게 해야겠구나!”하는 느낌이 예전보다 빠르게 왔다.
2. 절대 방송을 먼저 듣지 않는다.
성우들이 연기했던 파일을 먼저 듣게 되면 은연중에 그들을 따라 하게 될까 봐였다.
그래서 내가 먼저 연습해 보고, 이 역할을 어떻게 소화했는지 궁금한 작품만 챙겨서 들었다.
일종의 ‘비교 학습’이랄까? 모범답안(?)을 먼저 보지 않고, 내가 먼저 연기를 고민한 뒤에 답안지와 비교해 보는 것이다.
조금 더 일찍 이런 방법으로 훈련을 했더라면, 우왕좌왕했던 시간을 줄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쓴웃음도 나왔다.
분명한 건, 2009년 시험이 내가 남긴 가장 큰 성과는 단순한 ‘합격’이 아니라, ‘나만의 연습법’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드라마 대본을 독파하고, 연령대와 캐릭터를 분석하며 약점을 파고드는 방식은 강사로 활동하는 지금도 학생들을 지도할 때 큰 자산이 된다.
요즘은 학원에서 내가 했었던 방식대로 대본을 정리해서 무료로 나눠준다.
학생 입장에서는 시간을 절약한다는 점에서 큰 득을 본 것 같단 느낌이 들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대본을 통과해 봐야 느낄 수 있는 ‘읽기의 힘’이 생략된 거 같아 아쉽다.
29살의 나는 벼랑 끝이 아니라 출발선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꿈’과 ‘내 몫의 밥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애쓴 그 시절의 나.
그 시절을 돌아보며, 이렇게 글로 남길 수 있게 해 준 그때의 나를 토닥여주고 싶다.
다행이다. 잘 버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