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날 시험장의 기록(1)

by 성우 김태리

2009년 11월 29일.

그날의 공기와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누가 보건 말건 몸을 푸는 남자, 고개를 깊이 숙여 대본집을 들여다보는 여자,

누군가는 크게, 누군가는 작게 목을 풀었고, 벽에 대고 대사를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전 시험에서 KBS홀은 답답했고, 칙칙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맑고 들떠있었다.

손발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춥다는 생각이 안들 정도로 나는 상기되어 있었다.


시험은 오전인데도 약간 밀리고 있었다.

각자가 분주한 그 아침에, 함께 공부했던 동생을 로비에서 마주쳤다.

... 나는 참 약았다.

호들갑스럽게 반가움을 표현하면서도,

오늘의 대사가 뭔지 묻고 싶어 안달이었다.


시험 전 반은 진심으로,

“너 먼저 시험 치고 나 만나면 시험에 뭐 나오는지 꼭 알려줘야 해!”라고 말했었다.

헌데 천운으로 그 동생을 진짜 만났고,

동생은 그 잠깐의 사이에 나에게 정보를 주고 떠났다.

단어 몇 개, 장면 한 두 개였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연기의 지도를 예상해 그렸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험문제는 총 다섯 문제로, 각 문항이 4~5줄 정도 되는 단문들이다.

그리고 시험장에 들어가기 앞서 5분의 시간이 주어진다.

애매한 건, ‘대략’ 5분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 5분 안에 연기 문항들을 한 번에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말이 5분이지, 지난 시험까지 겪어본 바에 따르면 시간은 공평하지 않았다.

앞 팀 사람들의 시험 시간이 짧아지면, 내 대본 열람 시간은 짧아지고,

앞 팀 사람들의 시험 시간이 길어지면, 내 대본 열람 시간도 길어지는 것이다.


2010년부터는 타이머를 활용해 무조건 5분을 주기로 했지만, 2009년도 까지는 그렇지 못했다.

(현재 1차 시험은 모두 인터넷 접수로 바뀌었다.

그리고 2차부터 현장에서 직접 연기를 선보인다.)

그러니 한 문제라도 실마리를 얻고 들어가면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겠는가.


직원들의 인솔하에 시험장 앞 복도로 이동했다.

대기하는 사람들은 방해하지 않으려고 숨소리마저 줄였고,

시험지를 받아 든 사람들은 정신없이 소리 내어 읽기 시작하는 곳이다.

소란스러운 폭풍 속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거 같은 기분이었다.


앞 팀이 들어가고, 내 손에 시험대본이 쥐어졌을 때,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을 쳤다.

집중해야 한다.

5분이란 시간은 금방 사라질 거고, 다섯 문항을 완벽히 소화하는 건 불가능하다.

제일 잘할 수 있는 것 하나만 골라 5분을 쏟아붓는다는 게 내 계획이었다.

그래서 다른 문항의 대본은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의 대사는 짧은 형태로 아직도 입안에서 굴러 나온다.

”빙고! 형부, 엄마가 대오각성하셨잖아요. 어쩌고 저쩌고 ‘딸아,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거라’라고 하셨어요(웃음)“


“빙고”를 외치던 순간의 느낌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마이크 앞에서 몸을 흔들어 대며 즐거움을 표현했다.

소리가 망가지는 것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하지만 낼 수 있는 가장 또렷한 목소리로.

마지막 대사를 마치고 호흡을 가다듬었을 때, 심사위원이 입을 뗐다.

“내레이션 한 번 해 보세요.”


아... 잠시만... 저는 오늘 한 문제만 팠는데...

한 번도 콜(한 문제 더 연기는 것)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순간, 기쁨과 두려움이 함께 몰려왔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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