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그날 시험장의 기록(2)

by 성우 김태리

민망하게도 지난 세 번의 KBS시험에서 나는 단 한 번도 콜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내레이션 한 번 해 보세요.”라는 콜을 받았다.

얼굴과 머리로 피가 쏠려, 멍했던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레이션은 1번 문항과 5번 문항이었다.

몇 번 하라는 지정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은 내 자유였다.

1번은 1인칭 내레이션, 5번은 3인칭 내레이션.


지금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나는 주저 없이 1인칭을 선택할 것이다.

1인칭은 화자의 독백연기이지만,

3인칭은 글에 어울리는 목소리톤과 정교한 기교가 절묘하게 어우러져야 하는 고난도이기 때문이다.

연기가 쉽다는 게 아니라, 그 시절 나에겐 3인칭을 소화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러면 어쩌겠는가.

1인칭 독백연기를 할 수밖에.

하지만 한 문제에 올인하느라 내레이션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다.

다시 문제를 보았을 때, 처음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번만 읽어보고 시작하겠습니다”라고 태연하게 말했지만, 머릿속은 달리는 열차처럼 요란했다.

시끄러워서 내용이 잡히지 않았다.

글자만 눈에 담고 있었던 거 같다.

게다가 지금 내가 시험 시간을 잡아먹고 있다는 불안감이 온몸을 쥐어짰다.

그 몇 초사이에 그만하라고 할까 봐 바로 입을 떼버렸다.


“빙고”를 외칠 때만 하더라도 넓었던 부스가 좁아지고 있었다.

부스 유리창이 성큼 다가오고, 오른쪽 옆에 앉아 있던 시험 도우미가 내 옆으로 바싹 다가온 것 같았다.

서 있는 공간이 점점 납작해지고 있었다.


독백 내레이션은 드문 드문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를 떠나보낸 내용이었던, 그 분위기만 내 머릿속에 선명하다.


그때 혼자 공부했던 연습법이 많이 도움이 됐던 거 같다.

줄거리를 다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장면의 뉘앙스를 먼저 포착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목소리를 세팅한 다음, 문장마다 호흡의 길이를 달리해 리듬을 만들었다.

의미를 놓친 부분을 억지로 붙들지 않고, 전체의 흐름을 잇는 데 집중했다.

지금 들으면 얼기설기 했겠지만, 그 순간의 최선이었다.


연기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다른 연기자들이 연기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발가락이, 손가락이 말려들어갔다.

어깨가 미세하게 솟아 있었고, 목덜미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모든 연기자들이 연기를 마쳤다.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심사위원이 나를 불러 세웠다.


몇 번인지 정확하게 확인하겠다는 말.

그 말에 나는 가슴팍에 달아놓은 수험표를 뜯을 듯이 들이밀며 번호를 확인시켰다.


확신이 스며들었다.

‘될 것 같다.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12월 1일 화요일, 오후.

KBS합격자 게시판에서 내 수험번호와 이름을 확인했다.

그 주 토요일 오전까지 2차 시험을 보러 오라는 안내.

평생 내 것이 아닐 것 같은 행운이 내 손에 들어왔다.


남은 힘을 쥐어짜야 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던 나흘을 보내야 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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