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몽이라고 하면 보통 그렇다.
수능을 다시 치는 꿈이라든가 몸에 이상이 생기는 꿈,
물건을 찾아 헤매는 꿈.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꿔 보지 않았을까?
그런데 ‘성우’라는 직업군에 종사하다 보면,
때로는 조금 독특한 악몽을 꾼다.
아마도 대다수의 성우들은 한두 번쯤 꿔 봤을 꿈.
“목소리”에 관련된 꿈이다.
성우에게 ‘목소리’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생명줄이나 다름없으니까.
목소리 자체가 내 존재와 직결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몸이 조금만 아파도, 잠을 설쳐도, 목소리가 잠기면 바로 일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인지 불안은 언제나 목소리로 드러나고,
흔들리는 마음은 고스란히 꿈속 장면에 투영되어
내 자존감을 휘청거리게 만든다.
두 가지 악몽을 가끔 꾼다.
첫 번째는 이런 장면이다.
녹음실 안, 마이크 앞에 선 나를 제작진이 녹음실 유리창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다.
내가 내야 하는 목소리는 귀엽고 또렷한 톤인데,
아무리 용을 써도 목에서 나오는 건 쉬고 갈라진 소리뿐이다.
목소리를 조절하지 못해 제멋대로 흘러나온다.
녹음실 창 너머의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옆에 있는 다른 성우에게 배역을 맡긴다.
“다른 분 해 보실까요?”
순간, 그 억울함과 당혹감이란...
꿈에서 조차 숨이 막힌다.
눈을 뜨면 ‘꿈이었구나’ 안도하지만,
그 불안의 찌꺼기는 하루 종일 마음속을 어지럽힌다.
두 번째 꿈은 더 끔찍하다.
대본이 눈앞에 있는데, 글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눈을 비비고 가까이 가져가도, 활자는 흐릿하기만 하다.
마치 세상이 한순간 암전된 것처럼, 앞이 온통 깜깜하다.
간혹 글자는 보이지만 어떻게 읽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 꿈도 있다.
그럴때면 입술이 굳어버린다.
녹음실 밖에서 큐 사인이 들어온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큐!”
어떻게든 읽어보려 애를 쓰지만 결국 문장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단어를 더듬거리며 내뱉을 뿐이다.
차라리 녹음을 멈춰 주면 좋으련만,
밖에서는 아무 말 없이 계속 녹음을 이어간다.
나는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리며 식은땀을 흘린다.
그러다 간신히 눈을 뜨면
실제로 겪은 일인 것처럼
스스로도 부끄럽고 답답해서 잠시 멍해진다.
그럼 그게 꿈이란 걸 잊기 위해
일어나자마자 아무 의미 없는 단어들을 중얼거려보기도 한다.
물론 이런 꿈은 성우가 아니어도 꿀 수 있다.
하지만 성우니까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처음에 말했듯이, 목소리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와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악몽 속에서는 늘 목소리가 무너지고,
읽어야 할 글자가 사라져
결국 나는 무력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그런 꿈을 꾸기에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다시 목을 풀고,
대본을 붙들고 연습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악몽은 단순한 흉몽이 아니라
나를 다시 연습으로 이끄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그 꿈에서처럼 목소리도 나도 무너지지 않기를”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