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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은 Jun 16. 2021

아버님, 제사 꼭 지내야 하나요?

"아빠 소연이 언니 집에 언제가?"


어린 시절 내가 학수고대하는 날이 있었다.

나보다 3살 위 사촌언니를 만날 수 있는 날, 내가 무척 따르는 부산 큰아빠의 둘째 딸이었다.

일 년에 두 번 큰 명절, 바로 설과 추석 때는 어김없이 큰집에 모든 친척들이 모였다.

나는 늘 명절 하루 이틀 전에 가기를 바랐다.(지금은 안다. 엄마 마음은 최대한 늦게 가고 싶었을 거라는 걸)

명절 때면 차를 타고 부산 큰 아버지 댁으로 가서 두밤을 자고 왔다.

사촌들이 모두 모여서 함께 놀고 설에 세뱃돈을 받으면 문구점으로 가서 인형 옷을 사고 더 밑에 시장으로 가서 방방을 뛰고 국자를 만들어 먹곤 했다.

나는 물론 소연이 언니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언니가 시키는 심부름을 해가며 함께 노는 걸 기다리고 기대했다.

다른 사촌 동생들도 많았지만 나와는 나이차가 많이 나서 함께 논 기억은 잘 없다.

모두가 모여 큰 상에서 밥을 먹고 난 후에는 대식구가 모두 함께  어린이대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는 것도 물론 너무 좋아했다.

동물원도 가고 놀이기구도 타면서 즐거워했던 기억과 더불어 친정집에 사진첩에 사진으로 남아있다.

거기서 놀고 각자의 집으로 출발하는 수순이었다.

어릴 때는 그 기억밖에 없었다.

명절은 사촌언니를 만나고 용돈을 받고 하고 싶은걸 할 수 있고, 또 어린이대공원을 가는 날로 알고 있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고는 부산 시내 서면을 놀러 나갔다.

그곳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사고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먹고 영화를 보고 옷을 구경하고.

큰 도시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는 재미를 맛보았다.

물론 소연언니와 큰 언니 윤희 언니와 함께 삼총사로 돌아다녔다.

우리 동네는 없는 패스트푸드점도 언니들이 데려가 주었다.

부산에는 맛있는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언니들이 대학생이 되고 철이 들고 나서는 명절에 음식 하는 걸 돕기 시작했다.

전을 굽는데 하루 종일이 걸렸다. 나는 얼른 조금 도와주고 서면에 나가고 싶은데 철이  언니들은 큰엄마일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오랜 시간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불만이었지만 아무 말하지 못하고 혼자 버스 타는 법을 익혀 서면에 나가곤 했다.

대식구가 모이다 보니 설거지도 만만찮았다.

어릴 때는 놀러 나간다고 몰랐던 대부분의 시간들을 엄마와 큰엄마 작은엄마 등 모든 여자들은 집에서 이런저런 일을 해야 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허리 한번 피지 못하고 앉아서 일을 하셨던 거다.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을 했다.

이제는 명절에 큰아빠 집에 가지 않는다.

그런데 시댁도 가지 않는다.

내가 20대에 지켜본 결과 제사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늘 궁금했고 불만이었고 그러나 내가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이 되어버리고 그렇다면 '내 의견도 중요하지 않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님께 말씀드렸다. 나에겐 용기가 필요했다.


"아버님, 제사 꼭 지내야 하나요?"


우리 아버님께서 생각해보자 하셨고 시간을 달라고 하셨다.

말하고 나니 후련했고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결혼을 하고 제사 참석을 하지 않게 되었다.

명절 때는 남편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2~3년 정도 지나니 시부모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제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다.


"원래 우리 대까지는 지내려고 했는데, 이참에 제사를 아예 없애버리기로 결정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지만 그렇게 하시길 내심 바라기는 했다.

아버님의 결정으로 우리 어머님께서 더 좋아하셨다. 명절마다 나한테 고맙다고 하신다.

내가 아니었음 계속 일 년에 6번 이상의 제사상을 차리고 해야 했었는데 니 덕에 전 안 부치고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 다녀올 수 있다며.


내가 생각만 하고 불만만 품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늘 명절이 스트레스로 다가옴과 동시에 벗어나고 싶고 남편과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그런 감정들이 쌓이고 확장되었을 거 같다.

한 번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평생 해야 하는 일인데 납득가지 않는 상태에서 억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내가

일단 저질러 버린 것이다.

물론 각 집안마다 분위기도 다르고 각자의 성격이 다르다.

모두 우리 시댁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말하고 나니 속 시원하고 어른들도 내 생각을 알게 되고 그렇게 부딪히며 한 가족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된다.

우리 아버님께서는 그런 결정을 하셨지만, 다른 시아버님께서는 어떤 결정을 하실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다른 시아버님을 만났어도 이야기했을 거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서로 할 말은 할 수 있고 의견을 낼 수 있고 함께 결정할 수 있는 가족문화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요즘은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가부장적이고 유교문화가 뿌리 깊은 우리네 사회다.

친정집이 먼저나 시댁을 먼저 가느냐로 부부싸움이 시작되어 이혼까지 이루어진다는 기사를 심심찮게 읽게 된다.

명절 때만 되면 서로 조금의 양보가 힘든 관계가 되어버리고 그렇게 감정이 나빠지면 좋았던 기억들은 망각하게 되고 내가 이렇게는 못살지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이번에는 어디로 여행 간 거야?"

"저희 방금 제주도에 도착했어요"

"그래? 우리도 오후 비행기 타고 갈게. 제주도에서 보자"


제사를 없애고 행복한 목소리의 시어머니께 걸려온 전화.

남편과 나도 덩달아 기뻤다.

이렇게 가족이 함께 여행할 수 있는 추석이 너무 감사했다.

모든 사람이 명절 때 행복하길 바란다. 특히 우리 여자들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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