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벗은 지 일주일 만에 몸살감기가 된통 왔다. 팬데믹 2년 5개월 동안 감기로 병원에 간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아이러닉'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른다. 어제 휴강 안내문자를 돌리면서 '음.. 나는 영어강사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구나.'라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경단녀'라고 하기도 뭐 할 정도로 일을 오래 쉰 나의 아덴티티는 주부였다. 가끔 생명과학 전공자로서 과학 페스티벌에 실험 수업을 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었다. 친구가 운영하는 럭셔리 놀이학교에서 영어강사도 했었고. 그 당시에 자꾸 밖으로 일을 찾아다녔던 이유는 답답함이었다.
가족 피라미드에서 가장 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나는 가족 이기주의에 진저리를 치며, 아무도 내 시간과 노동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내 시간과 노동은 돈으로 환산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 작년에 일주일에 5일 학교 강의를 나가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운이 참 좋았던 것 같다. 학교 한 곳에 원어민 영어 수업 한국인 강사로 지원을 했었는데, 덜컥 합격을 하게 되었다. 시간 차를 두고 다른 학교에도 지원을 했었는데, 면접 때 방과후 강사 경력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열정을 어필하는 나에게 면접관들은 난색을 표했었다. 당황했던 나는 잠시 다른 학교에 출강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내 숨을 고르면서 타 학교에서 원어민과 한 팀으로 수업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자, 면접관들의 표정이 온화해지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최종 합격 통지를 받게 되었다.
연속해서 닷새를 수업을 나가게 되니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압박이 많았다. 당연히 집안 살림에는 전업 주부일 때보다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초반에 가족들은 내가 해 오던 집안일의 일정 수준을 요구했다. 깨끗한 집, 갓 끓인 국과 반찬.. 몇 번의 갈등 단계를 거쳐서 이제는 서로 <타협점>을 찾았다. "타협"이라는 단어는 내가 얼마나 독립적인 개체로서 인정받게 되었고, 내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준다.
나는 가족이라는 이름에서 당위적으로 느껴져야 하는 안정감이나 따뜻함 보다는, 한 사람의 인생을 갈아 넣는 희생을 뼈대로 유지되는 공동체라는 느낌이 세월이 갈수록 강하게 느껴졌다.
몸살감기로 휴강하고 병원에서 수액 맞는데,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