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 언니>

by hotlionheart


가족이 아닌데도 아니, 가족이 아니라서 더 나를 잘 이해해 주고 보듬어 주는 사람들이 누구에게나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

딸아이 세 살 쯤에나 만나기 시작한(A.D처럼 나의 시간 기준은 딸아이의 나이인 듯하다. 하하), 같은 단지에 살았던, 같은 구역의 성당 언니다. 그 언니의 세례명은 루피나이지만, 나 혼자서는 <healer 언니>라고 속으로만 부르고 있다.


전화도 카톡도 자주 안 하지만, 말 못 할 사정이 생기거나 어디다가 털어놓지도 못해서 끙끙 앓을 때면, 몸져누워있다가 힘겹게 통화버튼을 누른다.


루피나 언니가 힐러가 된 이유를 나름 분석해 보면, 단순히 나 보다 나이가 많아서라기보다는 성당 활동이나 특수학교 강사, 라인 댄스 강사 등의 사회 경험이 많고, 또, 대가족 속에서 성장하여 지금의 연배가 되어서 가족 간의 다양한 문제들을 접해보았다는 것이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날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승모근은 한껏 승천해 있었고, 쌀쌀한 날씨까지 더해져 몸살기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가보고 싶었던 논밭뷰의 한옥 카페에서 만나 대추차를 앞에 두고서, 누가 들을까 봐 목소리를 한껏 낮춰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딱히 해결책을 제시해 준 것도 아닌데,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언니의 맑은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이 노골노골 해지고 잠이 쏟아져 순간적으로 졸기까지 했다.


나는 졸다 깨서 언니에게, "언니, 나 지금 잠이 쏟아지는데, 이러는 거 대추차 마셔서 그런 거야? 아니면 언니 만나서 그런 거야?"라고 물었다.

언니는 "아마 둘 다 아닐까?" 하면서 유쾌하게 웃었다.


오늘은 그때보다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언니를 만났다.

오후 시간이라 파인애플 생과일 쥬스와 소금빵, 샌드위치를 시켜놓고 즐거운 수다 타임을 보내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젯밤 꿈에 아빠가 위독한 모습으로 나타나 아빠를 끌어안고 엉엉 울다가 새벽에 깼는데, 너무 현실 같아서 가슴이 아팠고, 세상 참 헛되고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는 얘기를 하게 되었다.


출근길 남편과도 나누지 못한, 새벽녘의 그 허무한 감정을 언니와 나누고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언니가 나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지 않도록 관계에서 내가 한 발짝 물러서 있을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Healer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keyword
이전 16화<명절이 제일 싫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