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ene (아이린)>

by hotlionheart


필리핀 이주 여성인 아이린(가명)은 나의 영어회화 선생님이었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겨우 주어진 4-5시간의 자유시간을 내가 좋아하는 영어공부에 쓰고 싶어서, 저렴한 비용으로 다양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여성회관에 영어회화 수업을 신청했었다.


인종 비하 발언은 아니지만, 아이린은 필리핀 여성치고는 큰 눈과 오똑한 코를 가진 미인형 얼굴이었다. 성격도 시원시원한 데다가, 수업 중간중간에 유머를 터뜨려주니, 그 시간만큼은 매일이 똑같이 반복되었던 지루하고 피곤한 육아생활을 잊을 수 있었다.


사 년 정도 아이린과 회화 수업을 하면서 따로 영문소설 스터디도 만들어 진행했었는데, 이때 출산과 육아로 백지상태가 되었었던 내 머리가 다시 지식이란 게 채워지면서 자기 만족감이 컸었다.


아이린은 필리핀에 어학연수를 왔던 현재의 남편을 만나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시댁의 반대로 결혼을 인정받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시월드와의 갈등으로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가 버린 적도 있었다. 어찌어찌하여 남편의 설득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우리 단지에 살게 되었다.


어느 날 아이린을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웬 나이 많은, 그러나 할머니는 아닌 아주머니와 같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말 그대로, 말로 아이린을 패고 있었다. 아이린의 모습도 평소에 보던 자신 만만한 표정이 아닌, 주늑 들고 눈치 보는 그런 모습이었다.


알고 보니 그분이 시어머니였던 것이다. 어떻게 저렇게 똑 부러지고 야무진 사람을 그 간에 얼마나 흠을 잡고, 말로 후드려 팼으면 아이린이 고개를 떨구고 시어머니 뒤를 쫓아가고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같은 며느리 입장에서 화가 났었다.


같은 단지에 사는 그 시어머니를 오며 가며 관찰해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참 친절하고, 마음이 후하기가 비할 데가 없다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감정이입이 되어 유아일체(you 我一體)가 된 것 같았다.


그 사이 십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이린은 거의 쉬지 않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일을 했다. 학생들, 엄마들 회화 과외부터 시작해서 학원강사까지.

이제는 같이 나이가 들어 눈가에 주름이 지고 피부가 쳐지기 시작했지만, 그 총명한 눈빛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마음 둘 곳이 없어 새벽에 공원을 배회하던 젊은 필리핀 여성은 이제 여기에 두 발로 땅을 단단히 딛고 서 있게 되었다.


그녀의 그간의 노고와 인내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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