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류층처럼

나에게 좋은 사람이란

by 코끼리 날개달기

나는 서울에서 350km 떨어진 작은 도시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만난 서울은 낯설고 어색했다.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처음 학교를 갔던 날, 교문에서 걷고 또 걸어 언덕을 넘고서야 드디어 학부 건물을 찾았을 때 기분이 생각난다.


- 와, 진짜 머네. 학교 엄청 크다.



마닐라에서 큰 아이가 다니는 국제학교를 처음 갔던 날, 아주 오랜만에 그 설렘을 다시 느꼈다. 시설의 거대함만큼 커뮤니티도 무척 공고했다.


- 여기 학교가 최고야!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큰 아이는 이 학교의 매력에 푹 빠져있다. 한국 가기 싫다는 말까지 나온다. 학교 덕에 필리핀도 좋아졌나 보다.





마닐라는 흔히 생각하는 필리핀의 세부나 보라카이 같은 멋진 휴양지가 아니다. 심각한 교통체증과 환경오염은 둘째 치고, 돋보기로 확대시킨 듯한 크기의 바퀴벌레와 쥐를 이웃하며 사는 곳이다. 마닐라에서도 제일 부촌인 지역이라 그나마 아파트 내부에는 쥐가 잘 없다.


마닐라의 부촌 중에서도 필리핀 최상류 층 혹은 외국 대사 등의 고위급 인사들이 모여사는 마을이 있다. 그 마을 한가운데에는 '마닐라 골프 클럽'과 '마닐라 폴로 클럽'이 있다.

집에서 운동삼아 걷다 보면 긴 울타리가 쳐진 넓은 지역이 나오는데,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울타리 사이로 '마닐라 골프 클럽'이 보인다. 그 틈으로 탄성을 지른다.


- 이야, 좋다. 좋다. 좋다!


사실 좋은지 안 좋은 지도 잘 모른다. '갈 수 없는 곳' 이기에 더 특별해 보이는 것일지도. 회원권이 대략 10억 원쯤 하는데 회원 자격을 따질 때 사회적 지위도 중요하기 때문에 일개 은행원은 돈이 있어도 살 수가 없다. 게다가 돈과 지위가 뒷받침돼도 회원수 제한 때문에 기회를 기다려야 한단다. 그 맞은편 '마닐라 폴로 클럽'도 마찬가지다.




- We've been waiting 8 month, huh!

(여기 회원이 되려고 8개월을 기다렸어!)


리나는 '마닐라 폴로 클럽'의 회원이 되기 위해 8개월간 얼마나 노력했는지 설명했다. 리나의 남편은 필리핀에서 누구나 알만한 세계적 브랜드의 대표를 맡고 있다.

내가 처음 리나를 만났을 때, 나는 그녀의 명품 사랑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레바논 출신이라는 말에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을 뿐이다.


- 레바논에 있는 가족들은 어때? 걱정되겠다.


이것은 마치, 한국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유럽인이 나에게 와서 북한에서 온 건지 남한에서 온 건지 묻는 거랑 비슷한 수준의 질문이었다. 레바논이나 아프가니스탄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전쟁에 내몰려 있는 것은 아니다. 최상류 층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마음씨 좋은 그녀는 늘 많은 돈을 필리핀을 위해 기부했다. 하지만 나는 끝내 샤넬, 루이뷔통 이외에는 그녀의 명품을 알아봐 주지 못했고 그녀도 나에게 폴로 클럽의 회원이 되기를 추천하고 있었으니, 우리의 관계는 인스타 친구로 남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마닐라 폴로 클럽'에 처음 가게 된 것은 큰 아이의 친구가 생일 파티에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골프클럽은 울타리 사이로라도 볼 수야 있지만, 폴로 클럽은 그야말로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정말 폴로를 할까? 검색창에 '폴로'를 쳐 봤다. 결과는 랄프로렌으로 가득했다.

- 와! 진짜 폴로다!


여기저기 막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큰 아들의 체면을 차리느라 그럴 수가 없었다. 차려진 음식에 진토닉을 한 잔 곁들이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폴로 경기를 즐겼다. 옆에서 아이들은 '피냐타'를 두드리고 있었다.

크리스텔은 막내아들 생일을 위해 4일 동안이나 집에서 피냐타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모든 것에 진심인 듯했다.



한 번은 크리스텔의 사진전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 아마도 밤에 어딘가로 이동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지 않았나 싶다. 필리핀은 위험한 곳이라고 밤에는 절대 돌아다니지 말라고 들었다.

사진전을 하는 입구에 들어서니 입장료를 받았다. 알고 보니 이 사진전은 가난 때문에 어렵게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엄마들을 돕고자 그녀의 재능을 기부한 '자선행사'였다. 넓은 홀을 채운 작품들은 모두 마닐라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의 사진들이었다. 쓰레기와 쓰레기 더미 속 집, 그 옆에 아이들과 엄마들. 남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고 그녀의 작품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금세 다 돌아보고 나니 딱히 할 것이 없어 와인을 홀짝이며 분위기를 살폈다. 남편이나 나나 이런 '자선행사'에 참여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 집 도마만 한 분홍색 샤넬백을 멘 리나도 멀찌감치 보였다.



작품집도 한 권 사고, 기부금을 위해 판매하는 가방도 사서 일찌감치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저녁을 못 먹은 우리는 근처에서 피자를 먹으며 잠시 동안 행사에 참석한 소회를 나눴다. 남편이 함께 있어서 어쩐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텔은 많은 행사로 늘 무척 바빠 보였다. 어느 날 아침에는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필리핀 CNN 인터뷰에 초청된 크리스텔이 나왔다. 마치 친한 친구가 엘렌쇼에 등장한 것처럼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스위스로 돌아간 그녀는 요즘도 살뜰히 안부를 묻는다. 마지막에는 늘 'big big hug'와 함께.






'자선행사'에도 가봤겠다 이제는 더 용기가 생겨서 필리핀 친구가 초대한 '아트 갤러리 행사'에도 가 보았다.

혼자서 갔다. 실은 가깝게 지내는 주재원 와이프 몇몇에게 물었으나, 모두 거절당해서 어쩔 수 없이 혼자 나섰다. 깜깜한 밤에 도착한 갤러리에는 한껏 차려입은 고객들이 가득 차 있었다. 갤러리에 들어서니 여기저기 걸린 그림들 사이로 와인을 나르는 웨이터들이 분주해 보였다. 입구에서 한 웨이터가 정중하게 와인을 권했다. 갑자기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맞나 하는 답답한 생각이 들어 반대쪽 입구로 나왔다. 바깥공기를 마시니 조금 나아졌을까.


- Hey! Come on! Have some drink!"

(어서 와! 한 잔 해!)


드레스를 차려입은 손님들과는 달리 내 친구는 귀여운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나에게 그림과 화가들을 설명해 주고, 수없이 내 사진을 찍어주며, 파티를 즐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내가 그림을 산다면 첫 한국인 고객이라며 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둘러보니 정말 모두 외국인이었다. 나 혼자 한국인. 마닐라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얼마나 많은데 여기는 나 혼자일까. 국제학교에도 미국인보다 한국인 수가 많은데 왜 여기는.

- It's for you."

(이거 가져.)


귓속말로 멤버들만 주는 거라며 테이블 밑으로 도록을 건넸다. 그림 한 점 사야 하는 거 아니냐던 남편의 말은 괜한 걱정이었다. 그저 그림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그림을 볼 기회를 준 것뿐이었다.


필리핀은 수도인 마닐라에 공공 도서관 하나 없는 나라다. 새로운 그림을 보고 싶다고 표를 사서 전시회에 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다. 먹고 살 걱정뿐인 대부분의 중산층에게는 그림 감상은 그저 사치다. 친구 덕에 나는 그날 밤 마음껏 사치를 부려보았다.


그날 본 그림들은 파리에서 본 모네의 그림만큼 깊은 추억이 되었다.




이제는 나에게 의미 없는 질문을 남편이 물어온다.


- 귀국 전에 ‘마닐라 골프 클럽’ 한 번 가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