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 듣는 아들!
- 아버님이 교주야? 사이비 종교냐고!
- 어머님이 시키면 다 해? 아버님이 원하면 다 해?
- 자기 집이 그렇다고 왜 내가 그래야 하는데!
- 부모님 말씀대로 살 거면, 가서 부모님하고 살아!
- 부모님이 집 사지 말랬다고 안 산다고? 그럼 따로 살자. 나 혼자 집 사서 애들이랑 살게.
종손에게 마마보이 정도는 비교될 바가 아니다.
종손에게는 아버지의 뜻이 곧 법이고 진리고 인생이다.
- 집안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 해.
- 현모양처여야지.
-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어.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할 법한 말이지만, 지금도 여느 집안의 ‘남자’ 어른들은 서슴지 않는 발언이기도 하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이제 속담은커녕 심각한 성차별적인 발언일 뿐이지 않나.
세상이 변했는데.
시가에 식사를 하러 가면, 2시간 여 넘게 앉아 있는 것도 힘들고 설거지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가장 힘든 것이 듣고만 있는 거였다.
종손 2명만 말을 했다.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나는 듣는 사람이다.
어림잡아 97퍼센트는 그들이 말하고, 나머지 3퍼센트는 여성 3명이 추임새를 넣는 정도다.
그마저도 대화의 중심은 아버지.
-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 아니야. 그건 말이지.
나는 부모님은 물론 친척 어른들 누구에게서도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자율적인 집안 환경에서 내 의견을 존중받으며 자란 나는 그 말이 적잖이 충격이었다.
종손이 불쌍했다.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나라면 저런 엄한 부모님 밑에서 못 견디고 비뚤어졌을 게 뻔하다.
그런데 나도 불쌍하다. 참 대단하다.
설, 추석, 다달이 제사, 시조부모님 생신, 시부모님 생신, 시부모님 결혼기념일, 남편 및 두 아이들 생일을 모두 시가에서 혹은 시가 식구들과 함께 보내왔다.
이제는 무조건 아버님 말씀 따르는 건 그만하겠다고 종손에게 선언했다.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무한한 사랑을 이렇게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반대로 아이들의 아버지 입장이 된 종손은 나에게 왜 아이들 의견을 다 들어주냐며 불만을 토로하곤 한다.
- 이제 겨우 12살인 어린애가 주말마다 친구들이랑 노는 게 말이 돼? 허락해주지 마. 아빠랑은 뭘 하자고 해도 다 싫다면서 친구들이랑 나다니는 게 나는 보기 싫다고.
- 자기, 걔 벌써 12살이야. 친구가 마냥 좋을 십 대라고. 우리가 지금 걔를 붙잡으면 걔가 불행해지는 거야. 친구들이랑 있는 게 즐겁다는대 좀 보내주자. 놔주자.
과연 42살의 종손은 ‘진심으로’ 12살의 종손을 놔줄 수 있을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