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대한시낭송협회에서 주최하는 공청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섰다. 시낭송가뿐 아니라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여 의견을 주고받는 자리였다. 주제는 '현재 시낭송대회 이대로 좋은가'이다. 부쩍 는 시낭송문화의 관심 때문인지 예상보다 마련된 자리는 입추의 여지가 없다. 가장 큰 이슈는 '시낭송가의 대회 출전이 형평성에 어긋나는가'였다. 현재의 시낭송대회는 시낭송가 인증서를 받은 이는 출전이 불가하다. 그러나 대회마다 우수자에게 부여된 시낭송가 인증서는 해를 거듭할수록 난발되어 1년간 부지런히 출전하다 보면 쉽게 획득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이른 시기에 인증서를 받은 시낭송가들은 무대에 대한 갈증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 제약을 없앤 대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어떤 기준과 변화가 필요한 때는 분명해 보인다. 어수선한 장내는 사회자의 정중한 인사말로 이내 정리되었고 패널들도 착석해 자신의 명패에 적힌 직책에 어울리는 표정으로 가다듬고 있었다.
-최근에 급증하는 시낭송대회를 통해 무수히 많은 시낭송가들이 배출되는 것은 무척 고무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시낭송문화의 대중화와 보급에 큰 기여를 하기 때문입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낭송은 바야흐로 대중문화로 자리 잡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 주목할 것들이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더 큰 도약을 위한 하나의 성장통 같은 것일 겁니다. 수적으로 커지는 만큼 질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배출된 시낭송가들의 무대 도전을 어떻게 독려하고 제시해야 하는지가 문젠데요. 이는 보다 나은 대안적 시스템이나 방식이 제시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패널뿐 아니라 참석하신 모든 분들이 귀한 의견들을 제시하고 서로가 지혜를 모으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사회를 맡은 이는 무척 젊어 보였다. 자신도 시낭송가이며 최근엔 시낭송가 인증서 보유자의 참가 제한에 걸려 2년째 대회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볼맨 소리를 했다.
-시낭송가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제한을 두지 않게 되면 그들만의 무대가 되고 상금은 그들이 독식하게 됩니다. 상을 받는 사람은 계속 받게 될 것이고 새로 도전하는 이들은 수상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시낭송 대회에서 일어날수 있기에 지금처럼 제약이 있어야 합니다.
지역에서 시낭송대회를 주최하고 있는 실무자라고 소개한 그녀는 단호하게 반대의 의견을 피력했다.
-저도 앞서 말씀하신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미 시낭송가가 되었다면 그들만의 무대를 만들어 올리면 되는 것이죠. 경쟁에서 검증받은 실력을 상금 경쟁에 악용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낭송가 인증서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기회를 박탈하는 일이니 절대 막아야 해요.
나이 지긋한 연배의 남자는 직전에 말한 두 사람의 목청을 합한 크기만큼 반대했다. 패널의 분위기는 반대 의견이 우세한 듯 보였다. 눈을 지그시 감고 노인은 경청하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온화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마이크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최근에는 부분적으로 시낭송가들의 기회를 부여하는 대회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희 지역에서 매년 개최하는 대회는 이곳 출신의 시인을 기념하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몇 해를 거치면서 집행부들의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보다 수준 있는 분들의 도전을 통해 우리 시인을 널리 알리는데 지금 조건이 방해물이 되는 건 아닌지 말이죠. 그래서 작년에는 한 차례 개방한 적이 있는데 무척 반응이 좋았습니다. 게다가 여느 해보다 수준 높은 대회였다는 평이 많았죠. 대회의 수준은 무엇보다도 참가하는 분들의 수준이 좌우한다고 느꼈습니다. 저희는 2-3년에 한 번씩은 오픈대회로 운영할 예정입니다. 저는 보완을 한다면 이상적인 방식도 가능하다는 의견입니다.
절충안을 제시하는 것은 신선하게 들렸다. 여전히 오픈 대회의 타당성은 뜨거운 여론에 비해 공론에서는 힘을 드러내지 못하는 듯했다. 이때 노인이 오른손을 가볍게 들고는 사회자로부터 발언권을 얻었다.
-근래 들어 시낭송대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현재 대다수의 대회가 진행하는 일괄적인 형태의 방식이 이상적인가에 대해서 말이죠. 예선을 치르고 걸러진 수십 명이 본선을 치릅니다. 시 한 두 편을 준비해 대회를 임하는 방식은 변별력도 낮으며 결과에만 집중하게 하는 부작용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게 무대 경험이 많은 이가 유리해지니 지금의 문제제기가 나온 것이죠. 근본적으로 현 방식이 아닌 토너먼트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적어도 대회 우승자는 심사위원이 아닌 대회를 지켜보는 청중에게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과정이 치열해야 하고 매력적이어야 하는 거죠. 한두 편의 시로 숙제 검사하듯 일련의 엄숙함이 아닌 전략적으로 준비한 다섯 편의 시로 매 대결마다 긴장과 감동을 연출하게 해야 합니다. 결국 낭송 스타가 대회마다 나오게 되며 이들을 다시 보고자 다음 대회를 기다리는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대상을 받는 순간 그의 운신의 폭은 좁아집니다. 잠시 부러움은 받을지 모르나 더 많은 무대에 설 기회는 역설적으로 줄어드는 게 현실입니다. 또한 시 한 두 편으로 이대회 저 대회 상금만을 노리는 병폐도 방지할 수 있으며 대회의 개성과 품격 또한 한층 높아지리라 확신합니다.
노인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참석한 모든 이들의 눈과 귀를 집중시켰다. 한편에서는 환호 섞인 박수가 터지기도 했다. 노인의 발언은 다음날 신문지면에 대서특필되었다. 시낭송대회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노인을 발언과 함께 분석기사까지 풍성하게 실렸다. 심지어 임기가 절반도 지나지 않은 대한시낭송협회 차기 회장으로까지 거론된다는 추측기사까지 보였다. 노인은 하루 종일 울리는 휴대전화를 외면한 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창밖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