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37회

사이를 생각할 시간

by 이숲오 eSOO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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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지난 시낭송 모임을 다녀오고 나서 마음이 혼란스럽고 집중이 되지 않았다. 걱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원인을 알 수 없어 더욱 답답했다. 대회 본선을 차근차근 준비하면 될 터인데 무엇이 문제일까. 마침 일정도 없어 불쑥 노인에게 식사를 하자고 연락했는데 그러자고 곧장 답변이 왔다. 노인에게 식사를 대접하면서 기분만 전환하자는 요량이었다. 그러고 나면 지금의 상태가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게 그나마 기대라면 외출의 기대였다. 소년의 답답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리의 바람은 여름답지 않게 선선했다. 그것도 잠시뿐 이내 이전의 상태로 돌아왔다. 노인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소년의 원인모를 고민은 내용은 없는 채 껍데기만 눈덩이가 되어 있었다. 노인은 소년을 보자 반갑게 맞아 주었다. 소년이 쭈뼛거리고 서 있자 노인은 더운 날 바깥 음식보다는 집에서 간단히 준비했으니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소년의 계획과 어긋나 다소 난감했으나 정류장에서 걸어오면서 뜨거워진 몸에 집 안 에어컨 바람이 감싸고돌자 거듭 거절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몸이 실내로 기울었다. 노인의 어깨너머 식탁 위에 수저와 간단한 밑반찬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걸 보니 갑작스레 제안한 말은 아닌 듯했다. 노인이 앉아있는 소년 앞으로 선풍기를 당겨놓았다. 미풍으로 눌러져 있었으나 시원했다. 에어컨 바람이 방 안 전체를 장악하니 선풍기는 돌아가는 흉내만 내도 그 위력은 만만치 않았다. 이를 시너지 효과라고 하나. 소년은 몸이 편안해지니 마음도 덩달아 편해졌는지 눈앞에 사탕을 발견한 아이처럼 말을 꺼냈다.

-요즘 시낭송이 별로 재미가 없어요. 예전처럼 즐거운 마음이 들지 않아서 힘들어요.

소년은 그런 말이 아니었는데 하면서 뱉어버린 말에 표정이 뒤늦게 따라 짓는 걸 스스로 알아차리고 더욱 멋쩍었다. 그만큼 소년에게 미더운 존재였다. 노인은 가만히 듣더니 그럴 수 있다는 듯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비스듬히 옆으로 젖혔다.


-시만 생각해서 그래.

소년은 시 낭송하는 사람이 시를 생각하지 뭘 생각하냐고 반박하기도 전에 노인은 말을 이어갔다.

-그동안 열심히 달려왔나 보군. 그런 고민도 노력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거니까.

노인은 일어나 서랍을 열고는 펜과 종이를 가져와 소년 앞에서 한글로 '삶'이라고 크게 쓰고는 종이를 돌려 앞에 놓았다.

-자네는 이 글씨가 뭐로 보이나? 잠시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눈을 떼지 말고 있어야 하네.

잠시 후 노인은 쟁반에 들고 온 물을 각자의 앞에 내려놓으며 무엇으로 보이는지 물었다.

소년은 무슨 큰 다른 의미가 있을까 주저하다가 있는 그대로 답했다.

-얼핏 보면 쉽게 읽히고 인식되지만 한창을 응시하고 있다 보면 금세 그 의미는 사라지고 글자의 모양만이 어른거지게 되지. 그러다가 그 글자의 발음까지도 무엇이었는지 잊기도 하지. 하지만 놀랍게도 다른 단어들과 글자 사이에서는 길을 잃지 않는다네.

소년은 알듯 말듯 하면서도 그럴듯했던 것은 노인이 말하는 내내 글자를 보고 있었기에 그 변화가 느껴져서다.

-어느 시인은 그의 시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가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이 남을 뿐이다.

소년은 그제야 아. 하는 탄식이 나왔다. 노인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시낭송을 더 잘 바라보려면... 아니 시낭송을 더 즐겁게 하려면 말일세. 시낭송과 동떨어진 무엇으로의 관심이 지속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네. 그러니까 집에만 있어서는 자네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듯이 말일세. 그래서 여행을 하는 거고. 풍경을 보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소리가 들려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간단한 식사라더니 열무 국수에 육전과 함께 여러 반찬들이 소년의 시장기를 부추겼다. 소년은 노인의 집에서 나오면서 위장의 포만감만큼이나 컸던 원인모를 고민의 체증이 해소됨을 느꼈다. 돌아오는 길에 노인이 말한 대로 여행을 갈까도 생각했지만 간접적인 여행으로 독서도 좋겠다 싶어 서점에 가서 철학, 건축, 미술 등 책들을 구입했다. 평소에 소년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관심을 보이지도 않은 책들이었다.











*김광규, 시<생각의 사이> 중에서 부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