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38회

제대로 돌아가면 직선보다 가까운

by 이숲오 eSOO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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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조용히 책을 읽을 장소를 찾다가 '잠시 멈춤'이란 뜻을 가진 영어 간판을 단 찻집에 들어갔다. 가운데 단어 알파벳 옆에 손잡이를 그려 넣어 찻잔을 형상화해서 의미보다는 이미지가 눈에 띄는 곳이었다. 맞은편에 우람하고 반듯한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으나 썩 내키지 않는다. 어딜 가나 통일된 맛이 누군가에겐 매력일지 몰라도 소년에게 치명적인 단점으로 다가왔다. 우연이 없는 규격의 것들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정이 가지 않는다. 테이블마다 의자의 형태가 달라 위치보다 독서하기 편한 자세를 상상해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보았다. 들어오면서 찬 음료를 마음에 둔 소년을 지나치게 냉방이 되고 있는 것에 마음이 바뀌어버렸다. 따뜻한 음료 항목에 보이는 낯선 메뉴, 쌍화차. 이름도 생소하고 맛도 궁금했다.

-실례지만 이건 한약 같은 건가요?

-재료는 한약재이지만 맛은 쓰지 않아요. 저희가 직접 백작약. 감초. 대추. 황기, 당귀 등 구해서 달인 거예요. 요즘 같은 날씨에 원기회복에 좋아요.

재료보다 주인의 넉넉한 미소가 음료에 대한 신뢰를 주는 듯했다. 주문을 하자 계란 노른자가 동동 달처럼 떠 있는 차가 투박한 작은 항아리 같은 잔에 나왔다.

쌍화雙和.

두 개의 서로 다른 것을 화합한다. 음과 양의 기운을 조화롭게 하는 차라는 거다. 차 이름에 재료가 아닌 기능과 지향이 들어 있는 것도 재미있다. 소년은 차를 한 모금씩 입에 댈 때마다 책 속 저자의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축구를 좋아하던 청년은 어느 날 헌책방에 본 한 건축가의 화보집을 보고 매료되어 그 건축가를 만나러 무작정 여행을 떠난다. 도착하고 보니 그는 이미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소년은 차를 한 모금 마시는데 잣의 묵직한 먹먹함이 입 안에 맴돌았다. 크게 실망한 청년은 그 길로 유럽의 건축물을 둘러보는 여행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건축을 눈으로 한껏 담아온 청년은 귀국 후에 독학을 하며 건축사무소를 개업하기에 이른다. 또 한 모금 들이키자 이제는 달큼한 대추가 씹히며 입맛을 돋우었다. 정규과정을 경험한 적이 없는 청년의 건축양식은 파격 그 자체이다. 지어 올릴 때마다 외형부터 동선까지 전에 보지 못한 구조의 건축물이라는 찬사만큼이나 조롱 섞인 기사들이 올라온다. '건축계의 괴물 탄생', '건축계의 이단아' 등 유별나다는 표현의 별명들이 그의 이름에 따라붙는다. 그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게 되자 그를 보는 세상의 태도는 달라졌고 이내 거장의 반열에 오른다. 소년은 마지막으로 한 모금을 마시며 미뤘던 노른자를 차와 함께 입안에 머금고 음미하는데 비릿하지 않았다. 이때 거장의 메시지가 파편처럼 눈에 들어온다.


바로 그 장소, 바로 이 시대가 아니면 불가능한 건축을 짓는다.

현재의 공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늘 고민한다.

건축은 밖에서 보는 형태보다 안에서 겪는 체험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건축의 배후에 있는 건축가의 의지가 얼마나 견고한가에 있다.


소년은 책을 가만히 합장하듯 접었다. 눈을 감은 채 음미하고 있었다. 그것이 차의 풍미인지 건축가의 신념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둘 다가 버무려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차가 온전히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스멀스멀 다른 생각들이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시낭송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그곳이 아니라면 안 되는 유일한 낭송을 하고 있는가. 낭송의 외향에 집중하느라 낭송가 내면의 상태를 소홀하게 다루지 않았는가. 소년은 그 어떤 낭송 관련 서적을 보아도 느끼지 못했던 감흥이 어느 건축가의 자서전을 보면서 밀려오는 것을 이상하리만치 즐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