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숲오 eSOOPo May 09. 2023

마음 설거지

0331

지난 주말 평소 아끼는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술에 취해 본래보다 커진 목소리에는 근심과 걱정이 두껍게 코팅되어 있다.

대충 고민의 전말은 이러하다.

파트타이머로 일하는 곳에서 사장이 임의로 변경된 업무일자와 시간을 통보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기존 업무시간이 40% 줄어들어 소비 생활에 지장이 크다.
자신의 자리를 치고 들어온 이는 최근에 군에서 제대한 사장의 조카라고 한다.
어이없는 것은 사장이 다른 파트타이머에게 물어보니 내가 괜찮다고 했단다.
익숙해진 리듬이 갑자기 바뀐 것도 당황스럽고 수입이 준 것도 막막하다.
사장이 너무 다정스레 말을 해 화를 낼 타이밍을 놓쳐 수긍할 꼴이 되었다.
왜 나에게 직접 묻지 않고 남의 말만 듣고 판단해 결정했는지 모르겠다.
이미 결정 난 일이니 어쩔 수는 없지만 속상하고 막막하고 화가 치민다.  

흠...

처음에는 두서없이 사실을 열거하다가 같은 내용을 두 번 언급하자 그제야 후배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 지금 네가 정확하게 화가 나는 건 뭐냐? 수입이 준 거? 사장이 미리 말 안 한 거?

- 처음엔 수입이었는데 지금은 미리 나에게 상의하지 않고 결정한 것이 화가 나요.

- 그 후에 사장에게 연락해 너의 불만사항을 말했어?

- 아뇨. 말하지 못하겠어요. 저는 현실 순응자인가 봐요. 시간이 지나니 사장도 이해가 되고... 조카도 이해가 되고... 다른 아르바이트생들도 이해가 되고...

- 하하. 이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표면적으로는 사장의 일방적인 갑질로 보이지만 후배의 대응태도에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너무 취한 후배를 달래 전화를 끊고 다음 날 다시 연락해 감정을 혼자 가슴에 담아두지 말고 사장에게 감정적이지 않은 메시지를 정중하게 전하라고 했다.

관계에 있어서 감정을 주고받다 보면 자칫 감정을 다치는 경우가 생긴다.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상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위계가 있는 조직에서 일방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때마다 내 안으로 감정을 쌓아두거나 나쁜 기분을 방치하는 것은 원망과 자기 비하로 점차 자존감을 해치는 요인이 된다.

감정 설거지가 필요하다.

감정을 사용한 후에 감정을 제자리로 가져다 놓아야 한다.

언젠가 다시 감정을 써야 한다면 내 감정이 늘 온전한 상태인 것이 좋다.

잔뜩 쌓인 설거지거리들을 지켜보며 새로운 밥상을 차리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사장에게서 받았다는 문자캡처와 함께 그러길 잘했다는 후배의 감사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랬군요. 미안해요. 근무시간에 대해서는 같이 만나서 다시 조정하기로 해요. 그리고 급할 때마다 대체근무를 군말 없이 해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후배는 곧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 아마 사장의 요구를 수용할 것 같다.

중요한 건 후배가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자신이 존중받을 충분히 귀한 존재란 걸 느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정의 설거지, 더 나아가 관계의 설거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내 감정을 사용하며 살아야 하고, 세상과 싫든 좋든 관계 짓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벽이 스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