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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May 02. 2022

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57회

네가 지금 그러고 있다

57




밀린 일기를 쓰는 일은 공룡 아랫배에서 배꼽을 찾는 것처럼 무모하다. 소년은 그간의 연습 방법을 복기하고 반추하느라 하루를 보냈다. 하던 대로 쭉 하면 습관은 안전하겠지만 발전은 위태로울 것이. 최근 들어 소년의 일기 쓰기 같던 매일의 연습들이 '해냈음'에만 머물러 근력키우지 못하는 웨이트 트레이닝 같았다. 그것은 연습을 하지 않는 시간대에 차이가 드러났다. 근육을 찢지 못한 느슨한 운동은 근육을 아름답게 만들지 못했다. 좋은 연습은 그다음의 행보를 분명하게 가리킨다. 나쁜 연습은 힘만 들고 불규칙하게 반복하는 호흡처럼 고민들을 뱉어낼 뿐이었다.


'틀에 박히다'라는 말만큼 틀에 박힌 표현이 또 있을까. 매너리즘은 글자 자체의 부드러운 모양새와는 달리 소년에게는 경계해야 할 말이었다. 익숙하다는 것이 습관을 끌고 온 첫 번째 엔진이라면 이제는 버리고 두 번째 추진체를 마련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은 낯설게 하기였다. 기존의 방식을 고집스럽게 쥐고 놓지 않으면 새로움은 요원할 것이 분명했다. 그 고민의 해답 찾기가 노인과의 만남에서 가능할 것 같았다. 소년은 보다 적극적으로 익숙함으로부터 멀어지기로 했다.




-이 손수건을 주우려 하여 보아라.

노인이 도포를 두르고 있는 걸 보니 조선시대로 보였다. 평소와 다르게 엄한 표정으로 소년에게 명령하는데 의중을 읽을 겨를이 없다.

-여기 있습니다. 선생님.

소년은 반바지 차림에 야구모자까지 쓰고 있어 민속촌이 아닐까 갸웃했다.

-네 이놈! 내가 주우려 해 보라고 했지 주우라고 했느냐?

-너무 억울합니다. 주우면 줍는 거고 줍지 않으면 마는 거지 주우려 하는 건 무엇입니까?

라임이 살아 있어 래퍼와 같이 손동작을 좌우로 하며 소년은 리드미컬하게 대꾸했다.

-네가 지금 그러고 있다.


늦여름의 오후 햇살이 구아바 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방 안에 힘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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