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지 20호
찔레꽃
송 찬 호
그해 봄 결혼식 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 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 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 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이 그렇게 징소리 한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에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새 달력을 꺼내 벽에 건 이후로는 첫눈이다
온 세상이 콩고물을 잔뜩 묻히고 설의 기다란 아가리를 기다리고 있다
눈송이의 무게가 가벼워 중력이 가소롭다
내려오다가 올라간다 옆으로 나리기도 한다
눈 글자 모양처럼 더디 내려온다
땅을 딛고 이동하는 곳에서의 약속은 취소한다
길이 미끄러운 게 일을 매끄럽지 못하게 막는다
길과 허공이 눈으로 경계를 지우고 뭉쳐버린다
지울 수 없다면 덮어버려도 시작이 될 수 있다
자연의 행위는 인간의 그것처럼 해석할 수 없어서 이 모양을 은폐로 읽으면 오독이 된다
쇼팽의 녹턴 1번 Op.9 No.1 클래식 기타연주 옆에서 찔레꽃 시를 읊으며 시작을 하얗게 맞는다
한송이 한송이 눈송이가 시어에 고이 내려 앉는다
처음이 이토록 고요하고 차분하면 좋은 징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