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구부정한 기억의 관절을 펼 시간

챌린지 37호

by 이숲오 eSOOPo

사랑의 역사


이 병 률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친 한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쳤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나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일상에서 공백의 순간은 반드시 도둑처럼 온다


내 뜻이든 내 뜻과 무관하든 비워야 하는 필연들


이틀을 정지된 듯 보내고 나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지럽다


굳은 관절들을 하나씩 펴고

굽은 기억들을 하나씩 편다


내 육체로 수십 년을 살아도 하루를 모른다


제자리에 놓인 사물들을 찬찬히 둘러본다


거기가 아니면 아닐 것 같이 놓인 정물이다


이 모든 풍경들은 죽음을 잘 학습한 사물의 가르침


욕조의 수도꼭지에서는 애써 참은 눈물이 떨어진다


이럴 때마다 나이테보다 깊은 마디가 생긴다


자연의 섭리는 허투루 작동하는 법이 없다


그 공백을 발판 삼아 다시 살아가는 이유를 배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