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지 36호
사랑의 전당
김 승 희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
회색 소굴 지하 셋방 고구마 포대 속 그런데에 살아도
사랑한다는 것은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
올리는
고구마 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
시퍼런 수박을 막 쪼갰을 때
능소화 빛 색채로 흘러넘치는 여름의 내면,
가슴을 활짝 연 여름 수박에서는
절벽의 환상과 시원한 물 냄새가 퍼지고
하얀 서리의 시린 기운과 붉은 낙원의 색채가 열리는데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것은 절벽이다
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절벽까지 왔다
절벽에 닿았다
절벽인데
절벽인데도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절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
낭떠러지 사랑의 전당
그것은 구도도 아니고 연애도 아니고
사랑은 꼭 그만큼
썩은 고구마, 가슴을 절개한 여름 수박, 그런
으리으리한 사랑의 낭떠러지 전당이면 된다
자세히 바라보면 향기마저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폴 세잔의 말이다
대충 본 탓에 그 자체만으로도 본질을 놓치게 된다
몸이 무거워 종일 침대에 누워 하루를 보내고 나니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를 바라볼 수 없어서 좌절
몽롱해서 제대로 볼 수 없다
하루가 통째로 뽑혀 나간다
본 것들을 쓰게 되는데 안으로도 밖으로도 흐릿한
무의식이 피곤하다
늙은 강아지의 기침 소리가 가까스로 보인다
보는 힘으로 산다
오늘은 두 눈이 살아나고 오래 바라볼 의지가 깨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