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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게 없다는 쓸데없는 핑계의 무덤 앞에 서서

챌린지 22호

by 이숲오 eSOOPo

기러기


이 면 우



저 새들은 어디서 오느냐고 아이가 물었다

세상 저 끝에서 온다고 말해주었다.


저렇게 떼 지어 어디 가는 거냐고 또 물었다

세상 저 끝으로 간다고 말해주었다.


그럼 어디가 세상 끝이냐고, 이번엔 정색하며 올려다본다

잠깐 궁리 끝, 기러기 내려앉는 곳이겠지, 하고 둘러댔다.


호숫가 외딴 오두막 가까이 키보다 높은 갈대들

손 저어 쉬어 가라고 기러기 부르는 곳

저녁 막 먹고 나란히 서서 고개 젖혀 하늘 보며

밭고랑에 오줌발 쏘던 깊은 겨울.




'쓸 것이 없다'는 글의 소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할 말이 없다'와 '쓸 것이 없다'는 상관이 약하다


대체로 이 증상은 말하듯이 글을 쓰는 데에서 온다

말하기를 글로 옮기는 것이 글쓰기는 아니기 때문


말의 언어와 글의 언어는 민물과 바다만큼의 차이

겉으로 봐서 물에 산다고 똑같은 물고기가 아니다


글을 쓸 때의 언어는 말의 언어 내피에 자리하고

말을 할 때의 언어는 글의 언어 표피에 자리해서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어야 글에서 생기를 풍기고

쓰기에 무모한 것들이어야 말에서 힘을 발휘한다


글은 말을 지우면서 활자로 피어나고

말은 글을 잊으면서 소리로 흩어진다


사실 쓸 것이 없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말이 넘쳐 글맘을 덮쳐버린 것


무수한 입을 닫고 몸을 가만히 한자리에 묶어두면 갇힌 글의 언어들이 기지개를 펴고 기어나올 게다


혀와 손은 스위치 같아서 동시에 작동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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