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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이현 Feb 03. 2020

 소설, 부적격의 인간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계

알베르 카뮈, <이방인>




"정상적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많게건 적게건 바랐던 적이 있는 법이다." (<이방인>, 민음사, 83p.)




소설은 우리에게 금지되어있는 언어와 세계를 이야기해도 되는 무엇인가로 만들어준다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내비치기 힘든 속내를 소설 속의 인물을 통해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의 정서로 대변하게끔 허용해준다.      


이를테면 노쇠한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자식 되는 우리가 슬픔이라는 한 가지 감정만을 오롯이 느끼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우리는 때때로 살아있는 존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연유로 그들의 이른 죽음을 바라곤 한다. 자신이 더이상 책임지기 힘든 어떤 중요한 존재의 끈이 자연스럽게 끊어지는 방법은 그저 죽음이라는 시간이 도래해서야 가능하므로



알베르 카뮈



"날이 저물고 있었고, 그것은 내게 있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시간, 감옥의 모든 층으로부터 저녁의 소음들이 침묵의 행렬을 이루어 올라오는 이름 없는 시간이었다." (<이방인>, 민음사, 101p.)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이 문장은 아름답다. 몇 번이고 음미해보면서 단어의 연결이 이루어낸 소리와 빛깔, 정서의 감각들을 깊이 느껴보고 싶은 부분이었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자신의 삶 중심에서 언제나 비껴가 있는 듯이 보이는 인물이다. 세상의 관습이나 규칙에 무관한 표정으로 대하며, 굴러가는 세상사에서 그는 그 수레바퀴가 이끄는대로 자신의 행선지를 따르는 듯한 삶을 산다.      


사실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특히 그가 왜 아랍인을 죽였는지, 자신을 불행의 문턱에 스스로 내몬 이유는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그저 작가에게 그 죽음이 소설적으로 필요했기 때문 아닐까. 작품해설에서조차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정신적 공허’를 이유로 들고 있지만 죽음의 뚜렷한 동기와 이유는 거론하지 않고 있다. 다만 아랍인이 뫼르소에게 죽임을 당한 희생자임에도 그에 대한 아무런 조명이 이뤄지지 않는, 철저한 이방인이라는 것뿐이다.      


또한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뫼르소는 자신의 깊은 감정이나, 동기, 삶의 목적을 내비친 적이 없다. 그저 주변인들과의 관계에서의 단편적인 감정들과 순간순간의 본능적 욕구, 실제 일어난 대화나 사건들만을 나열할 뿐이었다. 그래서 뫼르소가 타인에게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조차 이방인과 같이 살고 있다고 느껴졌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미없는 시간들을 그저 살아내고 있을 뿐인 존재이자, 자신의 운명을 재판하는 이들에게 내맡긴 채 자기변호 없이 죽음 앞에 선 자. 그리고 그런 그에게 삶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자, ‘저녁의 소음만이 침묵의 행렬로 이루어 올라오는 이름 없는 시간’이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런 세계관과 감정선을 가진 그를 우리가 단죄할 수는 없다. 완전히 자기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재판 과정에서 보여지는 우스꽝스러운 판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서로에게 낯선 이방인이 될 수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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