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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이현 Feb 24. 2020

데미안과 라미란

2020년 1월 3주 차 글쓰기 모임 과제 - 데미안(2)

“신이 우리를 외롭게 만들어 우리들 자신에게로 인도할 수 있는 길은 많이 있다.” (103p)

“나는 점점 더 몽환적인 붓놀림으로 대상이 없는, 장난 같은 더듬음에서, 무의식에서 나오는 선을 긋고 면을 채우는 데 익숙해져 갔다.” (110p) 

헤르만 헤세, 「데미안」, 민음사, 


우리 자신이 어떤 변화 속에 있으면, 자기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 한가운데에서 표류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장막에 가려진 채, 표지판도 없는 길을 따라 걸어갈 뿐이다. 뒤돌아봐야만 자신이 어떤 길을 걸어왔었는지 알게 된다.      


한 도시에 대하여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번화가보다는 뒤안길을 걸어 보아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한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때로 번듯한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서, 취기와 상실의 밤에 머무르며 진짜 나와 만나는 것 같다. <데미안>에서는 싱클레어가 주점에서 보낸 숱한 방황의 날들을 타락 또는 자신으로 가는 여정 중 잘못 들어선 길로 그렸지만, 사실 나는 그런 취기와 상실의 저녁 밤을 매우 사랑한다.      


드라마 <블랙독>에서 라미란(진학부장 역)이 힘든 하루를 마감하며 집에 남편과 자식을 두고, 귀가는 미루면서, 늦은 밤 취기에 몸을 휘청이며 인형 뽑기하고 있는 모습은 사랑스럽다 못해 부럽기까지 하다. 늘 "이 학교 센터가 나잖아"를 외치며 일터에서 번듯한 모습인 그녀는 모든 것에 도가 튼 생활 속 '데미안' 같다. 특히 이제 막 신참 선생으로 부임한 서현진에게는 닮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선배의 전형이다. 그러나 그런 라미란도 하릴없이 흔들린다. 그것도 무수히 자주. 그래서 오늘 밤에도 취기와 마비의 감각으로 인형 뽑기 앞에 서서 천 원짜리 지폐를 들이밀며, 기약 없는 성공을 바라본다. 


어떤 날에는 적절한 위로를 건네기도, 받기도 힘들다. 황량한 마음이 오가는 저녁 밤의 포장마차에서 홀로 울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도 아마 그런 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울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아침이지만 누군가는 다시 일터로 향하며 일상의 업무를 몽환적인 감각으로 시작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전에 한 번도 발걸음 하지 않았던 장소를 장난 같은 더듬음으로 찾아 나설 것이다.          

 

tvn 드라마 <블랙독>에서 늘 "이 학교 센터가 나잖아"를 외치며 어려움을 극복해가던 진학부장 역의 라미란. 일터에서는 데미안이 되려 애쓰지만, 인형뽑기 앞에서 자주 번민한다.


“삶은 다시 예감과 비밀에 찬 영롱한 여명이었다. … 나는 다시 나 자신에게로 편안히 안착했다. … 나는 더없이 열렬한 노력으로, 부서진 삶의 한 시기의 폐허들로부터 자신을 위하여 <환한 세계> 하나를 지으려 다시 노력해 봤다.” (107p)
“그중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모든 것이 말할 수 없이 나를 매혹시켰고 긴장시켰다. 잠언 하나가 아직도 생각난다. … <운명과 심성은 하나의 개념에 붙여진 두 개의 이름이다.>” (113p.)      


‘안착했다’라는 단어에서 안도감이 느껴진다.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에 당도한 것이다. 한때는 부서지거나 폐허로 남겨진 내면을 그저 응시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도 있다. 뒤섞인 감정들 속에서 허우적대며 발붙인 땅과 스스로의 껍데기를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싱클레어처럼 ‘자신을 위하여’ <환한 세계> 하나를 지으려 다시 노력해보기도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시간이 약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무슨 바람이 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신이 그린 그림 속에서 우리는 영원히 다 이해하지 못할 또 하나의 선이 그어지고 면이 채워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매일 밤 하루가 지나가고 다시 영롱한 여명이 다가온다. 어떤 운명과 심성으로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에 안착할 수 있을까. 예감과 비밀에 찬 미지의 오늘 앞에서, 다시 터벅터벅 길을 나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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