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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니 Jan 07. 2019

독서의 연대기

인생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었던 시기를 꼽으라면, 초중고등학교 시절이 아닌가 싶다. 초등학교 때 살던 이층집의 옥탑방에는 어머니가 어린시절 보던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는데, 두 살 터울의 언니와 나는 서로 경쟁하다시피 이 책들을 읽어댔었다. 그림책도 아니고, 깨알 같은 글씨로 인쇄된 300페이지 정도의 책 100여권으로 구성된 전집이었는데, 이야기에 쏙 빠져 좋아하는 책은 한 20번도 넘게 읽었던 듯싶다.


중학교 시절부터는 이른바 용돈을 서점에 갖다 바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읽고 모으던 책들은 만화부터 과학책까지 다양했었다. 과학고를 지망했던 언니 덕분에 자신도 과학을 좋아한다고 착각했던 나머지 고등학교 때까지 과학책을 사 모으고, '뉴턴'이라는 과학잡지를 받아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이과를 선택했지만, 아뿔싸 대학에 오고 나서야 내가 인문적 인간임을 깨달았다.


30대 초반까지는 책에 대한 집중도가 엄청 좋아 한 권을 잡으면 앉은 자리에서 한, 두 시간 정도면 뚝딱 해치우곤 했는데(통독에 익숙한 편이다), 요즘은 한 권을 한번에 끝까지 읽는 일이 무척 드물다. 일단은 여유로운 시간이 많이 확보되지 않기도 하고, 나이가 들수록 이리저리 신경 쓰고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아지니 심리적으로도 잘 빠져들지 못하는 면이 있다.


덕분에 책을 읽는 방식도 바뀌어 예전엔 당연히 한 권을 다 읽고 다음 책으로 넘어 가던 것과 달리, 요즘엔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일이 잦다. 관심의 폭이 넓어지는 탓도 있고, 필요에 의해 읽어야 하는 책이 많아지면서 그 때 그 때 필요한 부분을 읽는 발췌독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살면서 책의 세계에 몰입한 몇 번의 시기가 있는데, 대학부터 가늠해보자면 대학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올라가던 겨울, 이탈리아 상주여행을 준비하던 시절, 그리고 두 번째 책인 '집을 여행하다'를 쓸 무렵이다. 대학시절의 겨울은 스스로에게 침잠해 묵묵히 책들을 읽어나가던 시간이었는데, 재미있게도 그 시간을 보낸 뒤 맞이한 4학년은 마치 신입생인 된냥 모든 배움이 즐겁고 신났었다. 일종의 웅크렸다 기지개를 펴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이탈리아 상주여행을 준비하던 시기는, 복잡한 절차들을 하나씩 해결해가며 집 근처의 북까페에서 수많은 책을 읽었다. '잔디와 소나무'라고 '좋은 생각'을 발간하던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까페에는 수백 권의 책들이 있었는데, 자부하건대 그곳에 있던 거의 모든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그 때 생긴 버릇 중 하나가 문장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마음에 들어오는 문장들이 하나씩 필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사실은 타이핑이었지만). 그러던 내가 이탈리아로 떠날 때 가져갈 수 있는 책은 단 세 권이었다. 읽어도 읽어도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을만한 책을 심사숙고해 골랐고, 그 책들을 수없이 반복해 읽으며 나는 다시 모국어와 사랑에 빠졌었다.


석사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회사에 근무하며 저녁 시간에 조각글을 쓰며 첫 번째 책을 냈고, 다시 책들을 많이 읽기 시작한 것은 두 번째 책을 마무리 짓던 시기였다. 당시 문학 동네에서 운영하던 '까페 꼼마'와 또 다른 북까페 '토끼의 지혜'를 드나들며 또 책들과의 연애에 빠져들었고, 하루를 온전히 책의 세상에 있다 오면 마치 샤워를 한 듯 그리 개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나 둘 축적된 문장들이 두 번째 책의 각 꼭지를 여는 아포리즘이 되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나 문장을 채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요즘 집중해서 책을 읽는 일이 드문 나를 보며 어쩌면 영상 미디어에 너무 길들여진 것은 아닌가 반성해 본다. 이미지의 홍수가 싫어 트위터를 고수하면서도, 집에 돌아오면 쉬운 오락거리를 찾아 자연스럽게 인터넷 창을 연다. 영상 미디어는 짧은 시간 엄청난 정보를 쏟아내며, 순식간에 시간을 잡아먹어 버린다.

이쯤 되니 며칠에 한 번씩 인터넷 까페를 찾아 필요한 정보만 찾아보던, 덕분에 자연스럽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 잠들던 상주여행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책에게 연애를 걸 때다.


2019.01.07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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