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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니 Jan 19. 2019

타인을 믿는다는 것

이탈리아에서 극단 생활을 할 때 했던 신체 훈련 중 하나는 두 사람씩 짝이 되어 한 사람은 눈을 감고, 다른 한 사람은 인도자가 되어 공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극단 생활 초기라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들이었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나의 운명을 온전히 맡기고 그 사람에만 의지해 좁은 공간을 돌아다녀야 했다.


처음에는 두려움에 한 발 짝도 내어딛지 못했다. 조심스레 한 발 짝을 떼어보지만, 파트너를 잡은 손에는 바짝 힘이 들어간다. 그러다 서서히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며, '어쨌든 이 사람이 나를 부딪치게는 하지 않겠지' 하는 작은 믿음이 형성된다. 차츰 무념무상의 마음 상태가 되어 걸음은 편안해지고, 마침내 자유롭게 공간을 돌아다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겁 같은 5분이 지나고 디렉터가 눈을 뜨라는 선언을 하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가 서로를 얼싸안았다. 손 잡는 것조차 어색하던 사이였던 것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마치 오래 동안 알아 온 사이인 양 시간과 거리를 훌쩍 건너뛰어 버리는 것이다. 이 간단한 연습을 통해 인도받는 이는 상대를 온전히 신뢰하고, 인도하는 이는 상대를 절대적으로 보호하며, 두 사람 사이에는 완벽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한 예술센터의 워크숍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무용가인 선생님은 우리를 센터 뒷마당으로 데리고 갔다.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짝을 짓게 하고, 한 사람은 눈을 감고 다른 한 사람을 눈을 감고, 반대편 끝까지 뛰어가 보라고 주문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몹시도 주저했다. 모르는 이와 손을 잡는 것도 어색하기만 하고, 억지로 눈을 감긴 했지만 경사와 장애물이 있는 허공을 두려움 속에 간신히 걷는 정도가 최선이다. 선생님도 이미 예상한 듯 자연스러운 것이라 다독였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고, 내가 눈을 감는 쪽이 되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극단에서의 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냥 허공 속으로 두려움 없이 내달렸다. '내 눈으로 안 살피고 가도 되다니, 이거 너무 편하잖아!' 간만에 가슴속이 뻥 뚫린 듯 신나게 달음박질했다. 한없이 자유로웠다.  


달리기를 끝내고 돌아온 우리에게 선생님이 물었다.

"눈 감고 뛴 거 맞아요?"

"네, 맞는데요. 왜요?"


우리가 너무 빨리 달려서 눈을 뜨고 뛴 줄 알았단다. 하하하.


눈을 감으면, 일단 두려움이 몰려온다. 막막한 어둠 속에 덩그러니 남겨져, 온갖 상상력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코 앞에 장애물이 있을 것 같고, 갑자기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발을 헛디디지 않을까, 어딘가 부딪치지 않을까 온갖 걱정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내가 그렇게 두려움 없이 내달릴 수 있었던 것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대신 아주 단순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나를 지켜줄 것이야.'라는 지극히 단순한 믿음. 그것이 미지의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했다.


내가 현지 사람들 집에 머무르며 여행을 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두렵지 않냐고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믿느냐고 묻곤 한다. 여행의 켜가 쌓이며 어느 정도 사람을 보는 눈이 생겼기도 하지만, 사실 그 근본에는 극단에서 배운 이 '타인을 믿는 연습'이 자리한다. 그 두렵던 첫걸음이 내 삶의 지평을 넓혔다.


2019.01.19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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