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학원생활 9

시간의 흐름

by 굿 리더 히꾱

기다림과 마음 읽기는 바로 통하지는 못했다.

하루하루 마음을 단련하는 나날들이었다.

그러다 나도 한계를 느끼며 그녀가 말했던 방법들에 눈을 돌릴 때 즈음

아이들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나와 나눈 사소한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나와 약속한 규칙들을

지켜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방법이 여러 성향 아이들에게 다 통할까? 의문이 들었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성향은 다를지라도 진심은 통한다였다.

다만 그 진심의 문이 열릴 때까지 각각 다른 시간 차가 있을 뿐.

그렇게 하나둘씩 마음을 통해 주고받는 아이들에게 힘을 얻어 열심히 한 주 한 주 수업 준비하고

해 나가다 보니 매서운 찬 바람이 부는 겨울학기가 시작되었고

천방지축 뛰어놀기 바쁜 아가 모습들을 가지고 있던 4살 아이들이 어느덧 의젓한 5살 언니 형님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내 자식들도 아닌데 그렇게 뿌듯하고 보람될 수가 없었다.


아이들 현장을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해왔지만 전혀 처음 느껴보는 보람된 경험과 느낌이었다.

정말 뼈를 갈아 넣는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매일매일 뼈 마디가 아프고, 갈리는 느낌이 들면서 하루 4시간 이상 푹 자보지 못한 채

단 한 주도 마음 편히 휴무를 보내지 못한 채

환기되지 않는 환경이 내게 준 빌어먹을 부비동염으로 지속되는 기침으로 점심도 걸러가며

겨울 학기 3개월을 꼬박 해냈다.

단 한 가지!

내가 맡고 있는 아이들만큼은 끝까지 잘 마무리해서 6살 반으로 잘 올려 보내고 마무리짓자!

그 생각하나! 만으로 버텼다.

이미 퇴사를 결정한 거다.


그 생각이 마음에 내리 꽂혀 있을 즈음 그녀가 재계약 시즌에 맞춰 말을 건넸다.

해맑은 친절한 말투로 "선생님 저희 재계약서 다시 써야 해서요~"라고...

그녀는 내가 당연히 "네"라고 대답할 것을 예상한 듯이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난 1초도 걸리지 않아 "아니요. 저는 사실 겨울 학기까지 마무리하고 아이들 잘 올려 보내고 퇴사를 고민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건넸다.


그때 그 말을 들은 그녀의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몹시 당황한 듯 보였고, 다소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러더니 쉴 새 없이 본인 생각을 몰아붙여 내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느냐고? 어떤 부분을 고민하시는 거냐고 저는 지금 선생님들 구성이 다 좋아서 오래 함께 하고 싶고,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재계약 이야기를 이렇게 꺼내지도 않았을 거라면서..."

나는 그냥 있는 사실 그대로 건넸다.

"처음에는 처음 도전하는 분야라 최저 급여를 받고도 감사했고, 근무가 끝나고도 내 개인 시간 없이 연무의 연장선에 놓여 있어도 내가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니 더 열심히 수업을 채우고, 기회 주신만큼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해왔다고 하지만 원래부터 좋지 않았던 건강문제도 일을 계속해 나가면서 더 안 좋아지고 있고, 학원의 문제보다 개인적인 문제들로 지금 급여로는 길게 지속하기에 다소 힘들 것 같다." 등등

그동안 나 나름대로 열심히 임했고, 쉽게 결정한 부분이 아니고, 개인적인 부분들과 연결 지어 고민했을 때 퇴사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내용들을 나열해 나갔다.


물론 예상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답정녀인 그녀가 어떤 말들을 쏟아낼지 말이다.

이미 여름에 한 번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때보다 더 한 말들이 있을까 싶어 마음 내려놓고 체념한 채로 그녀가 쏟아내는 말을 담아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더 한 말들을 내게 쏟아내었다.


그 많은 말들 중에 잊히지 않은 말은 이것이었다.

"선생님이 그렇게 밤낮으로 열심히 수업 준비하고 일해오신 거 근데 학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생님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서 아닌가요? 그리고 선생님이 아무래도 속도가 빠르신 편은 아닌지라 어디 가서 원장을 하시게 되거나 리더가 되신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업무 속도는 필요할 거예요. 그리고 선생님 업무 방식 스타일 또한 선생님이기에 그러하신 거고 선생님은 어딜 가셔도 이렇게 일하실 분이에요. 그리고 처음엔 아무래도 경력이 없으셨기에 그렇게 급여를 책정했고, 드라마틱하진 않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올려드리려고 했고,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늦게 출근하시는 것도 검토하고 변경된 사항으로 재계약서를 쓸 계획이었어요. 그럼 당장 지금 퇴사를 하신다는 건가요? 아니면 아직 고민 중이신 건가요? 그럼 생각하시고 말씀 주세요... 그리고 선생님 속도에 맞춰 저는 늘 배려해서 선생님에 맞춰서 진행을 해왔다. " 등의 말이었다.


다 기억나진 않는다. 그녀가 쏟아내는 무수한 말들을 듣는 그때

어떤 이름 모를 행성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귀가 먹먹해지고, 마음이 답답해지면서 깊은 바닷속에 빠진 채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해

숨이 턱까지 차올라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으니까.

매번 느끼지만 도무지 왜 나라는 사람을 그렇게 단언하는 걸까?

날 낳아준 내 부모도 나를 그리 단언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내가 열심히 해온 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라고?

그럼 그 수업의 성과와 결과물들은 그저 얻어진 것들인 건가?

그냥 그녀는 날 까마득한 인생 후배즘으로 생각하면서

저 밑에 두고 가르치면서 본인의 위안을 얻고 싶은 건가 보다.

그래 좋다. 그녀에게 내 실력을 증명하고 인정받고 싶은 생각은 그다지 처음부터 없었다.

난 그동안 좋은 평가를 받아왔고 나 스스로도 내 역량을 믿으니까.

하지만 내가 날 낮추고 겸손했던 건 내 역량의 이유가 아닌 그저 처음 도전하는 분야이기에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무지해서 낮춘 거였는데 아차! 싶었다. 사회에서 함부로 날 낮춰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할 때즘엔 너무 늦었다.

쉽게 다시 말해서 첫 단주를 난 잘 못 꿴 거다.

다시 풀기엔 너무 늦어 버린 거다.


그렇게 어색한 기류가 한참 흐른 뒤 그녀와 대화는 급히 마무리되었고, 모든 수업이 끝날 즈음

갑자기 그녀가 문을 열고 무언가 황급히 던져주듯 "이건 미리 준비했던 선물이에요." 하며 나갔다.

그건 성경 구절들이 있는 예쁜 책과 그녀가 적은 엽서였다.

대략 그간 1년 동안 열심히 해 준 것에 대한 감사함 표현이었다.

멋쩍어졌다.

그녀는 아마도 내가 당연지사 재계약을 순수히 할 거라 생각하고 그렇게 본인 예상대로 재계약이 성사된 후

멋들어지게 선물을 주고 싶었을 텐데.....


그렇게 그녀가 던져주고 간 책을 손에 쥐고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 한 동안은 그녀와 나 사이에 알 수 없는 어색한 기류가 흘러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꽉 찬 수업 스케줄과 쉴 새 없이 수업 준비와 진행을 하다 보니 그런 생각조차 못할 만큼

겨울학기도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은하철도 999가 실제로 있다면 이런 속도로 달렸을까...?'

작가의 이전글슬기로운 학원생활 8